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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연기 찬 복도, 생사의 순간 생생해" 참사 기억에 갇힌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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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병원 아비규환 현장 또렷이 떠올라 '트라우마'…살아남았다는 죄책감도

연합뉴스

밀양 화재 생존자 이송
(밀양=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26일 오전 대형 화재 참사가 발생한 경남 밀양시 가곡동 세종병원 화재현장에서 소방이 생존자를 인근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2018.1.26



(밀양=연합뉴스) 허광무 기자 = "잠이 오는데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검은 연기와 열기로 가득 찬 복도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코에서는 불 냄새가 나요."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생존자인 양중간(68)씨.

2층 창문으로 탈출한 그는 28일 현재 밀양윤병원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다.

적잖은 연기를 들이마셔 몸이 성치 않지만, 정작 양씨가 괴로운 순간은 생사가 엇갈리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예고 없이 떠오를 때다.

세종병원 2층에 입원해 있던 그는 "대피하라"는 외침을 듣고 복도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코앞을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연기와 함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열기를 느낀 양씨는 계단으로 탈출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시 병실로 들어온 그는 다른 환자 3명과 함께 병실 창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여차하면 뛰어내릴 요량으로 나갔지만, 다행히 창문 밖으로는 4명이 서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양씨와 3명은 소방관이 창문턱에 걸쳐준 사다리를 타고 건물을 벗어났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올려다보니 불과 몇 초 만에 1층 응급실의 불꽃이 방금 빠져나온 창문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38명이 숨진 참사의 현장에서 무사히 벗어났지만, 그의 기억은 화염과 연기로 가득 찬 병원 안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

심한 비염을 앓는 양씨는 최근 다리 수술을 받은 아내의 식사를 챙기러 하루 몇 차례 외출하는 조건으로 화재 이틀 전 세종병원에 입원했다.

양씨는 "2∼3번이나 계단으로 내려가려다가 도저히 어려울 것 같아서 병실로 돌아갔다"면서 "그 과정에서 조명이 모두 꺼지고 연기가 가득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복도에서 마주쳤던 사람들, 겁에 질린 채 소리치며 대피하던 그분들이 모두 결국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는 내가 살고 그분들이 다 돌아가실 줄 몰랐다"면서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1∼2명이라도 더 데리고 나왔을 텐데…"라며 자책했다.

양씨는 "흔히들 참혹한 기억으로 잠이 안 올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면서 "잠은 오는데 눈만 감으면 그때가 떠올라 잘 수가 없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아들과 대화하다가 '어디서 자꾸 타는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내가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면서 "기억과 신경에 각인된 참혹한 순간이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진다"고 호소했다.

양씨는 새로 옮긴 병원에서도 틈틈이 비상구와 대피로 등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밀양 세종병원 불…타버린 응급실
(밀양=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지난 26일 오전 7시 30분께 경남 밀양시 가곡동 세종병원에서 불이나 소방대원이 화재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2018.1.26



밀양윤병원에 입원한 또 다른 부상자 A(55)씨도 갈수록 커지는 자책감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허리 치료를 위해 세종병원 2층 1인실에 입원해 있던 그도 문을 열자 들이닥친 농연 때문에 복도로 대피를 포기했다.

그의 병실에는 성인의 몸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창문이 있었다.

A씨는 연기를 피해 병실로 들어온 작은 체구의 여성 2명을 먼저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그가 몸을 구겨 넣었지만, 그의 체구로는 어림없었다.

연기를 마셔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그는 허리의 복대를 풀고 다시 시도했다.

온몸이 긁히면서 창문을 통과한 그는 병원 밖의 시민들이 3단으로 쌓아둔 종이상자 위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상자는 제법 완충적인 역할을 해냈지만, A씨는 나무 쪽으로 떨어지면서 다시 몸이 긁혔다.

옷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사실은 한참 동안 신선한 공기를 마신 뒤 정신을 차리고서야 알게 됐다.

그는 아직도 검댕이 섞인 침을 뱉어내고 있다. A씨의 딸은 "아버지가 잠깐 눈을 붙이셨다가도 경기를 하면서 잠을 깨신다"고 안타까워했다.

A씨는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키며 "내가 빠져나온 창문이 저 달력보다 작았다"면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빠져나오기 불가능한 크기지만, 워낙 위급해서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사고 후 심리적인 회복을 위해 찾아온 정신과 전문의가 '살아남았다는 자책을 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죄인이 됐다는 기분은 점점 강해진다"면서 "이 기억과 감정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밝혔다.

정부는 부상자에 대해 건강보험 요양급여를 우선 제공, 치료비 지원과 심리상담을 최대한 지원하기로 했다.

hk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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