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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아침을 열며]쓸데없는 것들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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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쓸데없는 선물로 뭐가 좋을까.” 다음달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딸아이는 친구들과 선물을 교환하기로 했다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하기에 바빴다. “아니 졸업 선물인데 왜 쓸데없는 걸 사줘, 괜히 욕먹을라고. 필요한 거나 좋아하는 걸 선물해야지!”(작은 탄식 후 대답 없음)

20·30대 사이 ‘쓸데없는 선물하기’가 유행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연말파티 때부터 시작된 유행은 새해 들어 신년모임과 중·고등학생 졸업식 선물로도 등장하고 있다. 일부러 쓸데없는 선물 교환식까지 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쓸데없는 선물 추천’ 목록이 돌아다니고 관련 사진과 동영상이 인기다. 유명 유튜버들이 서로 쓸데없는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은 조회수 수십만회를 기록한다.

덕분에 예기치 않게 인기를 끄는 품목들이 있다. 전 대통령들의 자서전이나 응원봉, ○○당 입당원서 등 정치 관련 품목이 단골로 등장한다. 2016년 달력, 짚신, 수도꼭지, 보도블록, 김정은 초상화, 벼루, 인조잔디, 공CD, 꽝난 로또용지, 마네킹 발모형, 70·80년대 유행가모음CD…. 종류도 다양하다. 이를 두고 ‘왜 쓸데없는 것이냐, 쓸데 많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쓸데 있고 없고는 사용자에 따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당연히 다르다. 위에 열거된 품목들은 요즘 SNS에서 거론되는 것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쓸데없는 선물에는 나름 규칙이 있다. 선물 값이 1만원을 넘으면 안되고 5000원 이상은 돼야 한다. 선물을 주고받은 후엔 누구의 선물이 가장 쓸데없는지 1등을 가려낸다. 실용성이 없을수록 센스 있는 선물이다. 젊은이들은 쓸데없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한다. 저성장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최고의 미덕으로 통하는 시대, 왜 이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찾을까.

20·30대가 주도하는 소비형태 중에는 ‘작은 사치’가 있다. 2500원짜리 김밥을 먹고, 4100원짜리 커피를 마시거나 신상 디저트로 나온 6800원짜리 딸기치즈큐브셰이크를 맛본다. 팍팍한 경제사정으로 아늑한 주거 등을 꿈조차 꿀 수 없으니 당장의 작은 사치를 통해 만족감을 얻으려는 불황형 소비다. 소비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명품과 귀금속, 외제차 등을 통해 다른 사회구성원과 나를 구분짓는 과시형 소비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취향이나 경제사정보다는 주변인들에게 영향받고 유행에 따라 소비하는 편승형 소비가 있다. 편승형 소비는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가상통화 열풍도 속할 수 있다. 또 일시적 충동에 따른 소비, 대중매체에 영향받은 의존형 소비 등 다양하다.

‘작은 사치’에서도 알 수 있듯 소비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분석되지 않는다.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소비하는 인간)를 알려면 그 안에 담긴 사회적 맥락을 봐야 한다.

가상통화 규제를 둘러싼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중심에는 20·30대가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정부의 시장 규제에 반대하는 청원이 들끓는다. 21일 현재 ‘<가상통화규제반대> 정부는 국민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본 적 있습니까?’라는 청원에 22만3000여명이 동참하고 있다. 가상통화 투자자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 오를 대로 오르고 막대한 자본력이 필요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에 가담할 여력이 없는 젊은이들이 대박을 기원하며 손쉬운 가상통화 투자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선물하기는 젊은이들의 단순 놀이, 소비만으로 볼 수 없어 씁쓸하다. 선물 받는 이가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돈을 지불한다. 일종의 작은 사치다. 그 선물을 풀어보며 황당함과 기발함, 쓸데없음에 한바탕 웃으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누구도 쓸데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박수 치고 환호한다. 역설적이다. 끊임없이 ‘쓸모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20·30대는 약자이다. 이들에게 ‘쓸데없는 선물’은 위트 있는 작은 일탈과 같다.

군색함에 절어 매번 합리성을 따져야 하는 ‘가성비’에 대한 피로도가 분출된 것일 수도 있다. 잉여시대에 가성비가 좋지 않은 인간은 쓰이지 않는다. 쉽게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쓸데없는 선물하기는 단순 놀이를 떠나 우리 사회에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쓸모 있어야 하는가.

며칠 동안 고민하던 아이는 아직 쓸데없는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왜냐고 묻자 이번엔 답이 돌아온다. “근데 세상에 정말 쓸모없는 것은 없는 것 같아.”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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