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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한 문장'과 새해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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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의 日常詩話]

조선일보

유희경 시인·시집전문서점 주인


새해가 되고 서점에 찾아온 단골손님과의 대화가 자연스레 '새해 다짐' 쪽으로 흘러갔다. 그이의 올해 목표는 금연이라고 했다. "대단한 각오네요. 그래서 끊었나요?" 물었더니 "정초부터 딱 끊으면 정이 없으니, 설 지나고 할 거예요" 히죽 웃는다. 쑥스러웠는지 내게도 되묻는 손님에게 "올해는 책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답했다. 농담처럼 들렸을까, 서점 주인의 목표치고는 시시하다며 손님은 또 웃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서점 주인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 개업 직전엔 "지겨울 만큼 읽겠다"고 나름 각오도 했었다. 웬걸. 막상 해보니 회사원 생활을 할 때보다도 읽지 못한다. 핑계야 많다. 정리, 계산, 운영과 이런저런 궁리까지 혼자 해내야 한다. 막상 짬이 나도 마음이 급해 읽기보다는 쓰게 된다. 이제는 빈곤함마저 느낀다. 사실, 문제는 양보다 질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보니 독서의 방식도 그런 모양이 된다. 빠르게,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책을 덮고 마는 것이다. 고민도 성찰도 없이 한 권 독파했다는 만족감만 있는 무용(無用)한 읽기라니.

조선일보

김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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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대며 느리게 읽기. 이 당연함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해준 것은 올해 내가 처음 읽은 책인 김언 시집 '한 문장'(문학과지성사)이다. 제목만 보고 한 문장으로 된 시만 모아 놨나 싶었는데, 그럴 리가. 김언은 하나의 시를 "부서지기 직전까지 쥐고"(수록작 '완제품') 놔주지 않는 시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의 문장이 회오리치듯 변주되고 반복되며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나간다. 내게 시로 도착한 말들이 "도착해서 반복"된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와서" 시를 들려준다. 어지럽기까지 하다. 그만두고 싶었으나, 새해 첫 독서를 그렇게 마칠 수는 없었다. "안개를 걷어차면서 전진하는 인간의 발걸음으로"('강철보다 단단한 밤하늘을 별은 어떻게 운행하는가') 익숙한 미지(未知)에 당도한 사람처럼, 시를 처음 읽어낸 사람처럼 감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새삼스러웠기에 놀랍기까지 한 독서를 새해 첫 달이 다 가기도 전에 경험했다. 이것이 이 시집의 뛰어남 덕분인지, 새 마음가짐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읽기와 쓰기를 업으로 삼고도 독서란 매번 다르고 그래서 어렵고 그만큼 신비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은 알겠다. 올해는 정말이지 책을 부서져라, 읽어볼 참이다. 한 문장, 한 문장씩 곱씹으면서. "당신 글씨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색청')

[유희경 시인·시집전문서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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