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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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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고등학생·노동자·여성운동가 등 영화 <1987>이 담지 못한 스크린 밖 1987년의 목소리들…

“하나였던 노동자 대투쟁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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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의 열기가 뜨겁다. 개봉 16일째인 1월11일 현재 500만 관객에 육박하며 흥행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1987>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이르는 시간을 담은 작품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민주주의에 큰 족적을 남긴 1987년이라는 격동의 시간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의 원래 제목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부검의, 교도관, 대학생 등 공권력에 맞선 양심적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있는 배우의 수는 무려 125명에 이른다. 영화는 이렇게 세상을 바꿔낸 것은 양심을 외면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라는 걸 보여준다.

영화가 미처 조명하지 못한 평범한 이들의 사연은 많다. 각자 나름대로 1987년을 살아낸 고등학생, 노동자, 여성운동가들. 러닝타임 129분에 다 담을 수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이들은 1987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스크린 밖 1987년, 그날의 목소리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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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뜨거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정은정·한유미씨와 양규헌씨, 정문자씨(왼쪽부터). 허윤희 기자/ 한겨레/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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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교생 “87년은 승리의 기억”

1987년 6월 항쟁을 다루는 이 영화의 주무대는 서울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6월 항쟁 당시 대전, 대구, 부산 지역의 집회 모습을 담은 자료 화면이 나오지만 잠시 스쳐가는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인천, 경기도 안산, 광주, 경북 포항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서울 명동성당 내 농성투쟁에 이어, 6월18일엔 최루탄추방결의대회가 열렸고, 6월26일에는 전국 130여만 명이 참여하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개됐다.

그중에서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6월 항쟁과 국본>에서는 “1987년 ‘6·18최루탄추방대회’ 이후 전국적으로 고등학생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었다”라며 “대구의 평화대행진 시위에는 고등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1987년 당시 대구 경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닌 한유미(49)씨와 정은정(48)씨도 6월 항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들은 ‘고운’(고등학교 운동) 1세대다. 한씨는 “정은정 후배와 함께 시문학 동아리 ‘가락’에 참여했다. 그때 동아리 지도교사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준비하던 배창환 선생님이었다. 그분의 영향으로 사회과학 서적도 읽고 민중문학을 접하며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회장이던 한씨는 체벌, 강제 야간자율학습 등에 대해 학교 쪽에 문제를 제기하고 학생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대구 지역 고등학교 학생회장들과 ‘민주적 고등학교학생회’를 꾸리려고 했다.

정씨는 1980년 광주항쟁을 담은 영상을 보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국가폭력에 맞선 이들에게 빚진 마음이 들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구 반월당 집회 등에 참가했다. “그때는 어리니까 (시위대)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죠. 최루탄 때문에 눈물 콧물이 나니까 대학생 선배들이 눈 밑에 치약을 발라줬어요. 비닐로 눈을 가리기도 했고요.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등·하교를 하고 시위를 일상처럼 느끼며 살던 시절이었죠.”

어느덧 3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씨는 지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사무차장으로, 정씨는 민주노총 대구지역 일반노동조합 정책국장으로 일한다. 이들이 평생 진보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 것도 1987년의 영향 때문이다. “87년은 승리의 기억이었어요.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봤죠. 그게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어요.”(정은정씨)

노동자 “두려움보다 분노 더 커”

영화는 이한열 열사의 서울 광화문 노제가 열린 1987년 7월9일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노동자들이 억눌려왔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일어난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었다. 이 파업투쟁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 급속히 조직화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1986년 단위 노동조합 수는 2658개, 조합원 수는 103만5890명으로 조직률이 16.9%였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인 1987년 10월 현재 단위 노동조합 수는 3954개, 조합원 수는 137만2397명으로 조직률이 23.1%까지 올라갔다.

‘노동자역사 한내’의 양규헌(66) 대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경기도 안양의 대우전자부품 민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양 대표는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을 계기로 촉발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경험과 성과, 그리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노동자들의 울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29일 당시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라는 큰 성과를 얻었다. 노태우 후보는 이 선언으로 당시 시민들이 요구하던 대통령 직선제 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성취한 것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민주화였을 뿐,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경제적 민주화는 아니었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넥타이 부대’는 각자의 직장으로 돌아갔고, 거리엔 노동자들이 남았다. “거리투쟁을 하면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나오니 두려웠어요. 그때에는 두려움보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컸죠. 그래서 앞서나가 싸울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은 운수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6·29 선언 직후 경기도 성남의 택시노동자들이 월급제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어요. 이후 1987년 7월 초 울산 현대그룹과 울산 중소사업장까지 투쟁에 나선 거죠.” 7월 말엔 부산, 경남 마산·창원·거제 공장의 파업농성과 거리시위가 전개됐고, 8월에 접어들면서 대구와 경북 구미·포항은 물론 충남, 인천, 경기도 부천·성남, 전북, 충북, 전남, 강원도 등으로 파업이 확산됐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연인원 수는 200만 명, 파업 건수는 3341건에 이르렀다.

양 대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는 하나’라는 연대투쟁의 뜨거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를 포섭과 배제의 대상으로 구분관리하고 있어요. 그 결과 노동자가 파편화돼 가고 있죠. 그래서 더욱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를 외쳤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이 생각나네요.”

여성운동가 “남성보다 강했던 여성들”

영화 <1987>에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는 대학 신입생 연희와 그의 친구 정미뿐이다. 이들은 가상의 인물이다. 연희는 잘생긴 운동권 오빠 때문에 현실정치에 각성하고 변화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영화 <1987>은 남성 중심적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성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 여성운동가는 어디에 있었을까.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전 공동대표인 이화여대 ‘80학번’ 정문자(58)씨. 당시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정씨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함께 경험했다. “대학교 4학년 때 학내에서 전두환 독재 타도 시위를 하다 1년6개월을 선고받았어요. 9개월간 수감됐죠.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돌멩이도 던지고 연탄재도 던졌어요. 그러다 잡혀 뺨을 맞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만난 시민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연희를 도와주려고 가게 주인이 셔터를 내리잖아요. 저도 실제 그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인천 부평에서 노동자 투쟁을 할 때 백골단을 피해 판자촌의 한 집에 들어갔는데 그분들도 저를 숨겨줬어요.”

그렇게 학생운동·노동운동 현장에 있었던 정씨는 1987년을 함께 온몸으로 겪은 여성운동가들을 기억한다.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6월 항쟁 때 앞에 나섰던 여성운동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위해)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주기도 했지요.”

당시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1986년 6월에 일어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가 만들어졌다. 이때 구성된 대책위가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 발전했다. 또 ‘생활 속의 여성운동’이라는 기조를 내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자들의 상담과 권리 지원 활동을 하는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진보 여성운동의 모태가 만들어졌다.

정씨는 인천여성노동자회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 “주변에서 노동운동 하는 여성들을 ‘아마존의 여인들’이라 했어요.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굉장히 강했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것도 여성노동자들이었고요. 살아남아야 하니까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해야 했어요.” 정씨는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여성적 연대와 자매애, 그리고 정의에 대한 확신”이라고 힘줘 말했다.

참고 문헌

<6월 항쟁과 국본>, 성유보·김도현 외 지음, 민주화기념사업회·펴냄, 2017

<1987 노동자 대투쟁>, 양규헌 지음, 한내 펴냄, 2017

<1987 대구: 6월의 함성과 미래의 목소리>, 대구참여연대 지음, 삶창 펴냄, 2017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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