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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60년전 부푼 꿈을 안고 출발한 로켓 개발,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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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래&과학] 박상준의 과거창

1959년 대한우주항행협회 발족

국방부선 로켓발사 실험 성공도

미국 압력에 더 이상 진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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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아니면 80년대 초로 기억한다. 티브이(TV)에서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의 우주선 개발 과정을 소개하는 외국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중간에 나사의 동양인 과학자가 나와 설명을 하는데 이름이 ‘박철’이었다. 틀림없이 한국 사람일 거라고 짐작하며 어린 마음에 자긍심과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 한편 로켓을 만들거나 우주개발에 참여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구나 하는 아쉬움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박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접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러니까 21세기에 들어서고도 한참 지난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과학문화 관련 사료를 살피던 중에 ‘대한우주항행협회’라는 조직이 놀랍게도 1959년에 발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회지 1호에 우주공학자 박철의 논문도 실려 있었다.

대한우주항행협회는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학계와 국방부(공군) 등의 관련 인물들이 두루 포진한 한국의 첫 우주개발 전문가 집단이었다. 회지에는 로켓 발사체의 궤적 계산이나 엔진의 추진 연료 등 수식과 전문용어들이 빼곡히 들어찬 논문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으며,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이 협회 출범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실었다. 회지의 내용대로라면 한국은 머잖아 독자적인 우주선을 개발해 낼 분위기였다.

대한우주항행협회와는 별도로 아마추어 대학생들의 조직인 ‘한국학생우주과학연구회’도 같은 1959년에 창립되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로켓의 설계와 제작을 시도하고 미국공보원 등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19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면서 전 세계를 강타한 ‘스푸트니크 쇼크’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우주개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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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우주항행협회지 <우주과학> 1호 목차(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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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우주개발 열기는 왜 그대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바로 로켓 발사체가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체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당시 우리나라나 일본의 로켓 개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관련 기술의 이전을 통제하고 개발을 억제하는 정책을 썼다. 현재 북한이 보여주듯이, 대외적으로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고 발표하지만 로켓의 탑재체로 인공위성이 아니라 폭탄을 실으면 그건 바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1955년에 도쿄대학의 이토카와 교수가 ‘펜슬로켓’, 즉 연필만한 크기의 작은 로켓을 만들어 발사하는 실험에 성공했는데 바로 이것이 일본 로켓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해서 독자적인 로켓 개발을 진행하자 미국은 무기로 쓰이기 쉬운 고체로켓 연구를 그만두도록 종용하는 한편 액체로켓 기술의 이전을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그 뒤로 일본은 액체로켓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오늘날엔 독자적으로 위성발사체 로켓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1959년에 당시 국방부 과학연구소에서 로켓 발사 실험에 성공한 기록이 있고 인하대학교에서도 자체 제작한 로켓을 쏘아 올렸으나 그 뒤로는 미국의 압력으로 로켓 개발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 뒤 박정희 정권 시절인 70년대 중반에 미국 몰래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로켓 발사체 개발을 진행했다. 당시 눈치를 챈 미국의 고위외교관이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입맛에 맞을 메뉴가 없다는 핑계로 점심 대접도 하지 않고 홀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연구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듯 먼 길을 돌아온 우리나라의 우주공학 연구는 이달 초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자체 개발한 75t급 로켓 엔진 실험이 성공리에 끝나면서 비로소 본궤도에 오른 느낌이다. 2013년에 성공적으로 발사된 최초의 한국형 로켓 나로호는 사실 러시아 로켓엔진을 쓴 것이었는데, 이제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든 로켓 엔진을 써서 발사체를 쏘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는 국산 75t 엔진을 쓴 로켓의 발사 실험을 내년에 실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1959년에 대한우주항행협회의 창립 멤버였던 박철은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당시 아폴로 우주선 계획의 추진을 위해 전 세계에서 인재를 끌어모으던 미국의 초청을 받고 도미하여 나사의 에임스연구센터에서 37년간 우주공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우주왕복선 개발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목성탐사선 계획에도 참여했다. 그 뒤 2003년에 귀국하여 카이스트의 초빙교수를 지내며 70대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후학 양성에 매진했으며 나로호 3차 발사 종합점검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던 중에 스파이라는 모함을 받아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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