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friday] 뜨거운 한 잔… 그 속에 '봄'이 있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삶의 한가운데] [정동현 셰프의생각하는 식탁]

추운 날 몸 녹여준 사케

이가 갈리게 추운 날이었다. 내 입에서는 짐승의 갈린 배처럼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한 해 입고 버리면 된다는 SPA 브랜드 옷은 모스크바보다 더 낮은 기온을 갱신하는 서울 날씨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그 옷을 몸에 동여매고 적군이 쫓아오는 병사인 것처럼 찬 바람을 뚫고 작은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머리를 짧게 깎은 주인장이 인사했다. 나를 위해 남겨둔 것처럼 딱 한 자리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낮은 바 좌석 너머로 주인장은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은 채 날생선을 썰고 구웠다.

"모음 회 하나랑 히레사케(복어 지느러미를 넣은 데운 청주)요."

무정한 칼날 아래 기름기 머금은 겨울 생선이 단면을 드러냈다. 회 한 접시를 내놓고 주인장이 향한 곳은 구석의 화덕이었다. 끓는 물에 중탕을 해놓은 사케를 국자로 떠서 두툼한 자기(磁器) 잔에 담았다. 그리고 한쪽에 말려놓은 복어 지느러미를 담가 내 앞에 내려놨다.

"조심하세요."

주인장은 짧은 한마디를 던지며 라이터의 부싯돌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순간 잔 위로 파란 불길이 올랐다. 달궈질 대로 달궈진 술 속의 알코올 기운이 증기로 변해 올라오며 만든 찰나의 불꽃이었다. 시인 미당 선생은 이 히레사케에 대해 자고로 불을 붙여야 알코올의 나쁜 기운을 걷어낼 수 있으며, 추운 겨울 몸을 녹이는 데는 최고라고 말했다.

아마 그 유래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말미, 일본 정부는 주식인 쌀로 술 빚기를 금지하는 대신 몇몇 양조장에 '삼증주'라는 화학주 생산을 독려했다. 양을 세 배로 늘린 술을 뜻하는 것으로 본 술에 들어 있는 것보다 알코올을 세 배 첨가하고 떨어진 맛을 화학 조미료와 당분으로 맞춘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술의 풍미를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을 첨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추리다.

그리고 그 시절을 미당 선생은 살다 갔다. 지금도 50도 이상으로 데워 마시는 아쓰캉(あつかん)은 싼 술을 먹는 방법으로 보통 알려져 있다(사케에 따라 맛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근래 그렇게 술을 뜨겁게 달궈 내놓는 곳은 흔치 않다. 차갑게, 혹은 실온에서 사케를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값도 싸지 않다. 일식 주점에 가면 한 병에 10만원 넘어가는 사케가 수두룩하다.

사케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던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과 맞물려 사람들은 더 고급스러운 술을 원했다.

그리고 지자케(地酒) 열풍이 불었다. 각 지방에서 난 쌀로 빚은 프리미엄 사케가 쏟아져 나왔다. 고시노칸바이(越乃寒梅)를 비롯해 핫카이산(八海山), 구보타(久保田) 등 지역별로 이름난 사케들이 사람들의 높아진 취향을 만족시켰다. 주욘다이(十四代)와 같은 특급 사케는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며 급이 높은 종류는 값이 100만원을 훌쩍 넘긴다.

쌀을 얼마나 깎아 썼느냐에 따라 준마이긴죠(60% 이하), 준마이다이긴죠(50% 이하) 등으로 등급을 나누고 누가 양조 책임자인지, 어떤 쌀과 물을 썼는지, 효모는 어떤 종류인지 따진다. 여기에 가열처리 하지 않은 생(生) 사케와 샴페인처럼 기포가 올라오는 사케, 시기별로 쏟아져 나오는 한정판 등 구분하자면 종류가 끝도 없다. 맛 또한 아미노산도와 산미 등을 세세하게 밝히는 브랜드도 많다. 그러나 1000년의 전통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놓는 곳은 없다.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떤 문헌에서 그 전통을 밝히고 있는지, 정부가 그 전통을 옳다고 증명했다고 내붙이지 않는다. 대신 매해 열리는 사케 콘테스트와 잡지 같은 매체에서 어떤 사케가 우수한지 판명하고 사람들은 평과 주관에 따라 사케를 고르며 그 사케 값에는 자연히 프리미엄이 붙는다. 새롭고 젊은 양조가들은 증명할 수 없는 전통에 매달리는 대신 공법을 연구하고 재료를 발굴하며 더 좋은 맛과 향을 위해 정진한다. 경쟁과 자본주의가 결합한 간단한 논리다.

이에 비하면 우리 땅에서 나는 술을 싸잡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전통주'라 부르는 이 나라의 정책은 '신토불이'로 대표되는 감성팔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것이니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를 뿐 소비자를 유혹하지는 못한다.

그날 밤 나는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라는 미당의 시구를 떠올리며 겨울의 숨소리를 들었고 그이가 마셨을 히레사케의 맛을 떠올리며 잔을 비웠다. 잔 위의 불길은 금방 사그라졌고 곧이어 강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곳에 아직 오지 않은 봄이 있었다. 채 터지지 않은 꽃망울을 지닌 수줍은 향은 잠깐이었다. 그 뒤로 칼에 스러지듯 져버리는 벚꽃의 아득한 그리움이 길게 그림자를 뉘었다.

슈토: 음식에 맞춰 사케를 즐길 수 있는 서울 도곡동의 선술집이다. 주인장은 사케 한 잔을 따를 때마다 그 역사와 맛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곁들이는 음식도 구색 차원을 벗어나 있다. 먹다 보면 생각한 예산을 초과하기 일쑤이지만 그 맛과 분위기, 그리고 사케 구색을 생각하면 납득할 만하다. (070)8251-0213

[정동현 셰프]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