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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현장에서] 1000억 들여 끝낸 ‘로봇 프로젝트’ 재탕한 과기정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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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위한 ‘디지털 컴패니언’ 과제

교과부가 추진했던 ‘실벗’과 빼닮아

10여 년 지난 기술에 또 세금만 낭비

중앙일보

최준호 산업부 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3일 ‘과학기술로 독거노인 고독사 해결 나선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사회문제 해결형 기술 개발 사업’이라는 취지의 이 신규 과제는 ‘고령자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디지털 컴패니언(companion·동반자)’ 개발을 위해 올해 말부터 2020년까지 4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내용이다.

쉽게 풀면 독거노인들을 위해 곰돌이 인형 크기의 지능로봇을 개발하겠다는 얘기다. 과기정통부의 설명에 따르면 곰돌이 로봇은 꽤 쓸모 있어 보인다. 곰돌이 로봇의 얼굴에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통신 기능이 장착된 스마트기기가 달려있다. 같이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으면 “너무 오래 앉아 계신 것 같아요. 차 한잔할까요”라며 활동을 제안한다. 캘린더 속의 지난 일정을 기억하고 말을 걸기 전에도 “아드님께 전화를 걸어볼까요”하고 전화통화 권유도 한다. 갑자기 넘어지는 등 응급상황이 생기면 119에 신고도 걸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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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정통부가 13일 발표한 독거노인을 위한 지능로봇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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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이다. 대당 2000만원 이상이라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감성로봇 ‘페퍼’가 울고 갈 정도다. 고령화 시대 1인 노인가구의 정서적 소외와 이로 인한 고독사가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박 조짐까지 점쳐진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어디선가 본듯하다. 노인의 벗이란 뜻의 이름인 실벗이란 로봇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과기정통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교육과학부는 2004~2013년 10년간 총 1000억원짜리 국가 R&D프로젝트인 지능로봇사업단을 추진했다.

주관을 맡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영어교습 로봇 ‘잉키’와 노인을 위한 로봇 ‘실벗’개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기서 ‘성공적’이란, 정부의 R&D 평가에서 ‘우수’등급을 받았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커버스토리로 잉키와 실벗을 ‘올해를 빛낸 50대 발명품’으로 소개했고, 스웨덴 등 유럽 곳곳에 시제품이 팔려나갔다. 실벗 역시 곰돌이 로봇처럼 사람을 알아보고 같이 있는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화투와 같은 게임도 할 수 있다. 통신기능도 장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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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를 빛낸 50대 발명품&#39;으로 극찬한 KIST의 지능로봇. 10년간 1000억원이 들어간 국가 R&D과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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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원짜리 10년 과제가 끝난 2013년 이후 이 프로젝트는 어찌됐을까. 대기업들은 잉키와 실벗을 외면했다. 지능로봇사업단의 특허기술은 구구절절 사연 끝에 현재 로보케어라는 벤처기업에 흘러와 있다. 지난해까지 단 한 대의 로봇도 팔지 못했던 이 회사는 올 들어서야 수십대의 매출을 올리면서 회생의 시동을 걸고 있다. 국가 혈세 1000억원짜리 실벗 로봇기술을 보유한 이 회사와 2017년 말 과기정통부가 새로 40억을 투입한다는 고령자를 위한 디지털 컴패니언의 차이는 뭘까. 수년 전 이미 완성한 기술에 국가가 다시 세금을 쏟아붓는다는 얘기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비전과 전략이 수정되고, 그에 따라 국가 R&D 과제도 또 다른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뿌려진다. 과제를 수행하는 관료는 고시 출신의 엘리트들이지만, 영혼을 가질 수 없다. 1년이 멀다고 자리를 옮기고, 새 정부의 시책에 맞춰 아름다운 정책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 R&D 20조원은 눈먼 돈이 아니다. 시민의 유리지갑에서 나온 눈물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소중한 피다.

“실벗과 곰돌이 로봇뿐이 아니다. 정부부처 곳곳에서 중복과제가 뿌려지고, 성과없는 성공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국의 국가 R&D는 난치병을 앓고 있다.”

역시 국가 R&D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한 기업인이 기자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푸념이다.

최준호 산업부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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