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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편집국에서] 더 많은 침묵이 깨져야 한다 / 김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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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올해 출판과 웹툰에서 화제작이었던 <82년생 김지영>과 <며느라기>를 보고서 공통적으로 놀랐던 점이 있다. 책과 웹툰에서 묘사하는 시어머니가 흔히 대중매체가 그려왔던 못된 시어머니가 아니었던 거다.

소설에서 시어머니는 상견례 때 딸이 살림을 해본 적 없다는 친정어머니에게 다 그렇다고 안심을 시켜주고, 웹툰에서는 시어머니가 명절 새벽에 며느리를 깨우지 않고 먼저 일어나 음식을 준비한다. 주말마다 찾아오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비싼 선물을 요구하지도 않으니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한 우리 시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웹툰의 한 장면에서 눈길이 멈췄다. 시집 명절을 치르느라 친정에 제때 가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며느리를 위한다고 시어머니가 다음에는 친정 먼저 가라면서 연휴 전주에 다녀오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몇년 전 설날 아침이 떠올랐다. 시어머니는 딸만 있는 우리 집(친정) 명절 아침마다 사돈 어른들이 쓸쓸하실 거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다. 딸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게 끝을 흐린 말의 마무리였을 거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으면서도 왜 나는 이런 말들을 당연시해왔을까.

올 한해 미국을 강타한 ‘미투’ 캠페인과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한 후배가 성평등에 관한 책을 쓴 남성 저자 인터뷰를 하고 와서 씩씩댔던 적이 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후배는 담배를 피웠는데 저자로부터 여자가 무슨 담배를 피우냐, 남편이 아냐, 남편이 가만있냐는 설교를 30분 넘게 들었다고 한다. 성평등 제안서 저자로부터 말이다. 같이 욕을 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언젠가 한 유명 예술가의 인터뷰를 가기 전 옆자리 선배가 “아마 그 남자가 너한테 자자고 할 거야”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인터뷰에서 돌아온 뒤 나는 그의 제안, 아니 성희롱을 뿌리치고 나온 이야기를 마치 모험담처럼 주변에 전했다. 여자동료들은 성희롱 요주의 인물 리스트를 만들고 그 인물을 만나러 가야 하는 상황이면 서로에게 사전 경고를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은 술자리의 오징어 안주처럼 흔했고, 우리는 더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식으로 위로를 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1970년대 초반 태어난 나의 엄마세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작 십년 먼저 태어난 여자들조차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도 똑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건 기적과도 같았다. 90년대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항상 비교되는 건 그 전 세대였던 탓에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처럼 여겨졌다.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 따위의 모토를 머릿속에 장착하고 여자임을 티내지 않으면서 일하려다 보니 어느덧 내면화된 남성을 내 안에 키우고 있었던 거다.

올 한해 한국 사회도 세계적으로도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었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던 나조차 무심하게 넘어가거나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부당한 처우와 모욕들에 대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와 연관된 논쟁도 많았고 갈등도 심했으며 때로는 부작용이라고 할 만한 사건도 돌출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익숙했던 것들과의 결별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진통일 것이다.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미투’ 캠페인에 동참했던 여성들을 선정해 반갑다. 오는 해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침묵을 깨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저 농담이고 장난이라고 빠져나가려는 성적 폭력들에 예민해지기를 바란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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