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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설립 24년만에 문닫는 유고전범재판소...반인도 전쟁범죄 심판의 '첫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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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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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보스니아계를 잔혹하게 학살한 ‘발칸의 도살자’ 3인방을 심판하는 국제전범재판이 마무리됐다. 재판 중 옥사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 지난해 징역 40년을 선고받은 라도반 카라지치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자에 이어 세르비아계 군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가 22일(현지시간)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고 내전에서 벌어진 반인도적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다룬 마지막 주요 사건이었다. ICTY는 다음달 문을 닫는다.

ICTY는 1993년 3월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두달 뒤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졌다. 이는 국제사회가 처음으로 전쟁에서 일어난 반인도적 범죄를 단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차 세계대전 뒤 전승국의 입맛대로 나치 전범을 처벌한 도쿄·뉘렌베르크 전범 재판과는 달랐다.

ICTY는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심판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1999년), ‘피의 다이아몬드’ 시에라리온 내전의 반인도 범죄를 단죄한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2002년), 라피크 하라리 전 총리의 암살을 다룬 레바논특별재판소(2009년) 등 뒤이은 국제전범 재판의 선례가 됐다. 무엇보다 ICTY의 경험은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립하기 위한 로마조약이 채택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네덜란드 클링인다우 연구소의 다이아나 고프 국제변호사는 AFP통신에 “ICTY는 전쟁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냉전 이후 국제 재판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알렉스 화이팅 하버드 법대 교수는 로이터통신에 “ICTY는 북극성이었다”고 했다.

재판소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회의론이 적지 않았다. 기소나 유죄 선고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거라는 냉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빌 클린턴 미국 정부와 토니 블레어 영국 정부의 지지가 보태져 재판소에 힘이 실렸다. 결정적으로 유럽연합(EU) 가입을 원하는 발칸 국가들이 도피 중인 피고인을 송환하는 데 협조해 기소와 심리가 진척될 수 있었다. 증인 4500여명이 남긴 고통의 기억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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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계 1만1000명이 목숨을 잃은 사라예보 포위 공격, 8000명이 무참히 스러진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 법정에 오른 사건들은 무겁고 거대하지만 법정은 단출하다. 방청석 99석 규모의 작은 현대식 법정에서 지난 24년 동안 155명이 재판을 받았다. 기소자 161명 중 마지막으로 6명이 오는 29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1996년 11월 첫 선고 이후 84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19명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20명은 공소가 취소되고 17명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선고 전 사망했다. 이 재판소를 거쳐간 재판관만 53개국 89명에 이른다. 한국의 권오곤 ICC 당사국총회 의장도 2001년부터 15년 동안 상임 재판관 및 부소장을 맡았다.

그러나 국제 전범재판은 여전히 이긴 자와 강국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 유고연방만을 관할로 했던 ICTY에 비해 로마조약 가입국 전체를 관할로 하는 ICC는 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전세계 600개가 넘는 해외 기지를 두고 있는 미국은 미군의 면죄부를 주장하며 로마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문제 국가’와 가까운 중국·러시아도 마찬가지다. ICC에 계류 중인 사건 25건 중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축출된 독재자나 내전·분쟁의 패배자들이다.

지난 3일 ICC 검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일어난 잔혹행위와 미 중앙정보국(CIA)이 동유럽의 비밀감옥에서 자행한 고문을 공식 조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이터통신은 “ICC의 의욕을 보여주는 상징적 움직임이지만 미국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적었다.

전범 재판으로 한 나라의 과거사가 정리되고 분열이 치유될 수는 없다. 재판을 놓고 보스니아는 갈라져 있다. 학살 피해자들은 이 재판이 고통의 책임을 물을 유일한 창구였지만 세르비아계는 ICTY를 정치적이라고 줄곧 비난해 왔다. 믈라디치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날 보스니아 동부의 세르비아계 거주지역에는 여전히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늘 제기되는 문제다. 카라지치는 기소된 지 21년만에, 믈라디치는 22년만에 선고가 내려졌다. 믈라디치 재판을 하는 동안 증인만 592명, 제출된 증거만 1만건에 달한다. 보스니아 내전을 일으킨 밀로셰치비는 5년 동안 재판을 받다 옥사해 단죄하지 못했다.

ICTY가 공개한 ‘정의의 비용’을 보면 지난 2015년 기준 최근 3년 동안 연간 9000만~1억2500만 달러(약 1000억~1300억원)를 썼다. ICTY에서 검사를 맡았던 덴버스텀대학 데이비드 애커슨 교수는 유에스월드앤리포트에 “한 재판 당 약 3000만 달러가 든다”고 전했다. ICC는 설립 10년만에 첫 선고가 나왔다.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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