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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소녀의 감정이 글 쓰는 나를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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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7년 만에 소설집 ‘뱀과 물’ 펴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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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52)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평소와는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서사는 희미하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다. 시대나 공간 배경도 명확하지 않다.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명시되지 않을 때가 많아 누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경향신문

7년 만에 펴낸 소설집 <뱀과 물>(문학동네)도 마찬가지다. 7편의 단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읽고 나서도, 누군가 “무엇을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1993년 데뷔한 이래 배수아는 줄곧 그러했고, 누가 뭐라 하든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하게 지켜왔다. 작가를 직접 만났다.

- 7편의 소설들은 대체로 소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내 글의 모티브 중 하나가 소녀다.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소녀의 감정이 글 쓰는 나를 자극한다. 나 자신이 어린 시절 체험한 감정이기도 하고…. <뱀과 물>에 실린 단편들을 쓰기 시작한 초반부, 체코 사진작가 프란티셰크 드르티콜의 사진을 발견했다. 이후 이 사진을 의식하면서 글을 썼고, 결국 책 표지로까지 제안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텍스트의 일부다.”

- 작품 속 소녀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환경 속에 있다.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부모는 사라졌거나 아프거나 미쳤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건 소녀라기보다는 소녀들의 감정이다. 내 소설에서 사건은 임의적이다. 감정이 가시적인 형태로 펼쳐지기 위한 배경이다. 난 가족이 없거나 희박한 소설, 여자와 가족을 분리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가족주의에 대한 저항이 있는 것 같다.”

표제작 ‘뱀과 물’에는 여승과 소녀의 문답이 나온다. 소녀가 꿈에 대해서 묻자 여승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문질러 끈 뒤 말한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배수아는 인터뷰 중에도 직관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 작가의 직관이란 어느 정도 믿을 만한 것인가. 거기 의존해 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믿는가.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글을 쓰는가’ ‘왜 이런 플롯을 가져왔는가’. 난 ‘직관대로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사건은 직관으로 구성한다. 메모하면 좋다는 건 잘 알지만, 난 메모하는 작가가 아니다. 게으른 데다 치밀한 성격도 아니다. 준비하고 연구해 쓰는, 예를 들어 ‘역사소설’ 같은 건 절대 못 쓸 거다. 내게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작업하고 싶다.”

- <뱀과 물>의 배경은 명확하진 않지만 1970년대 한국처럼 보인다. 왜 그때를 돌아보나.

“아마 내 기억과 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내게 70년대는 ‘불안정’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성이나 관념이 아니라 감각으로만 받아들인다. 그 감각을 다시 펼쳐보고 싶었다.”

배수아는 한국과 외국에서 번갈아 생활한다. 한국에서는 번역을 하고, 외국에서는 소설을 쓴다. 배수아는 최근 소설가보다는 번역가로서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프란츠 카프카, 페르난두 페소아, W G 제발트, 로베르트 발저처럼 낯선, 그러나 매혹적인 작가의 글을 한국어로 다듬었다.

- 왜 해외에서 소설을 쓰나.

“작가로 글을 쓸 때는 집이 아니라 다른 곳의 감각을 원한다. 여행이라고 해서 엄청난 건 아니고 장소를 바꿔 머무는 정도다. 완성은 한국에서 하더라도 글의 모티브, 줄기는 여행지의 불편한 상황에서 쓴다. 여행을 가면 주로 책을 읽는다. 그러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언어가 나타난다.”

- 번역은 어떤 점에서 흥미로운가.

“번역은 곧 ‘읽기’다. 독일어로 쓰인 책을 번역한다면, 내가 곧 최초의 한국어 독자가 된다. 그 점이 나를 매혹시킨다.”

배수아는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연습을 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글을 단편으로 완성시켜 데뷔했다. 그 이전에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다. 데뷔 이후에도 기성 문단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현재 격월간 비평지 악스트의 편집위원으로 일한다. 함께하는 악스트 편집위원들도 일을 하며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악스트에 참여한 것은 이 잡지가 번역문학을 비중 있게 소개하기 때문이다. 파스칼 키냐르, 다와다 요코 등을 표지로 올려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인터뷰했을 때는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개인적인 소설을 써오던 그가 악스트 편집위원으로서는 문학계 공적 관심사에 기여하는 셈이다.

배수아는 약속 장소인 경기 일산의 카페에 조금 일찍 나와 책을 읽고 있었다. 1977년 세상을 뜬 브라질 작가 클라리사 리스펙토르의 장편이었다. 배수아는 “어린 소녀가 등장하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소녀 내면의 모놀로그로 진행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좋아하는 여성작가를 만나기 위해 마르그리트 뒤라스, 엘프리데 옐리네크, 버지니아 울프를 거쳤지만, ‘환상적인 불협화음’을 내는 리스펙토르야말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했다.

배수아는 차기작으로 장편을 준비 중이다. 다만 여느 배수아의 장편과 마찬가지로 길이가 길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찌 보면 작가는 평생 하나의 작품을 다른 식으로 쓰기에, 작품이 길 필요는 없다”면서도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분량이 얼마나 될지는 써봐야 안다”고 답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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