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널어놓는다
빛바랜 칫솔을 물고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린다
거품을 문 입술은 지느러미보다 유연하다
칫솔이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소맷자락의 꽃들이 간들거린다
노파와 칫솔이 만드는 각도에 맞춰
마당 안의 사물들이 일제히 몸을 흔든다
마른 손등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담 밑의 꽃봉오리가 조금씩 입을 벌린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그림자를 발끝에 달고
아이들이 달려나간다
양은대야 가득 경쾌하게
구름이 흘러간다
오래전 지붕 위로 던진 치아들이
뭉게뭉게 떠 간다
-한세정(1978~)
마당 구석에 있던 변소가 집 안으로 들어온 걸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우유가 종이 안에 담겨 있는 걸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마당도 담장도 길도 산도 구름도 모두 실내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파트 베란다 바깥은 절벽이니 그럴 수밖에.
어린 시절엔 세수하러 나가면 개울이 밤새 맑은 물을 떠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먹을거리 놀거리가 없어도 눈앞에 펼쳐진 시야는 한없이 넓고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흙이며 돌이며 풀이며 벌레 따위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천재였다. 마당에서 양치하는 할머니는 이 모든 기억들이 살아 있는 놀이터이고 보물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다. 그 추억에 로그인하면 어린 시절은 바로 현재가 되고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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