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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Why] 감자탕의 맑은 기운, 숨을 고르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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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통인동 '통인감자탕'

조선일보

/정동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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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에 내리니 국적 불명의 옷을 한복이랍시고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격과 품위를 갖춘 멋이 아니라 코스프레 하듯 재미로 입은 모양새에 괜스레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 무리를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니 적선시장에서 이름을 바꾼 금천교시장이 펼쳐졌다. 공중에 아치 형상의 간판을 단 통인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송 출연 팻말을 높게 단 기름떡볶이집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떡볶이집을 앞에 두고 있는 듯 없는 듯 좁은 옆길로 빠지니 어둑어둑한 골목길이 나왔다. 10여m 앞에 붉은 타일로 마감을 하고 하얀 간판을 붙여놓은 집이 있었다. 하얀 간판에는 파란 글씨로 '통인', 빨간 글씨로 '감자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밝은 불빛에 깨끗이 정돈된 탁자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뒤로 곱게 빗어넘기고 자주색 조끼를 입은 여주인은 의자에 앉아 멀리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감자탕을 좋아하지만 즐겨 찾지는 않는다. 푸짐하게 뼈를 쌓아주는 이른바 대박집에 가면 사방에 튄 빨간 국물과 정신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탓에 제대로 식사하는 경우를 손에 꼽는다. 그러나 이 집은 작은 새들이 둥지를 오고 가듯 사람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아 각자 한 그릇씩 감잣국을 시켜 먹고 기껏해야 소주 한 잔,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눠 마시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메뉴는 단출하여 냄비째 끓이는 감자탕과 1인분씩 주문받는 감잣국<사진>, 안줏거리로 해물파전과 계란말이가 전부다.

찬 바람 부는 조용한 골목길에서 거한 냄비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감잣국과 그것만으로 아쉬워 해물파전을 시켰다. 주문이 들어가니 마른 체격의 남자가 뚝배기를 올리고 불을 붙였다. 한편에선 한 노파가 어느 곳에선가 나와 팬에 기름을 두르고 파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전 익는 냄새가 조용히 퍼졌다. 이미 익혀 놓은 것을 데우는 것이니 감잣국은 금세 나왔다. 국물은 죽처럼 걸쭉하거나 탁하지 않았다. 대신 '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 국물을 한 숟가락 조심스레 떠 입에 넣었다. 첫맛은 매콤했다. 그러나 혀를 때리는 듯한 매운맛은 아니었다. 감기에 걸린 날, 어머니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풀어준 것처럼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힐 정도로 몸을 달궜다.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자극이 아니라 그 울음을 멈추게 하고 숨을 고르게 만드는 순한 맛이었다. 국내산을 쓴다는 돼지 등뼈에는 적당히 살이 붙어 있어 배를 채우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국물 밑에 깔린 주먹 반만 한 감자를 조금씩 부숴가며 밥과 함께 먹었다. 하얀 밥을 국물에 말고 그 위에 고춧가루의 기운이 채 죽지 않은 겉절이를 올려 입에 넣었다. 집에서 부쳐 먹던 것처럼 파와 양파, 고추, 새우가 골고루 들어 있는 해물파전을 젓가락으로 찢어 양념간장에 찍어 먹었다. 숨을 고르게 만드는 거친 포만감 대신 몸 누일 곳을 찾게 만드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밖으로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골목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 집에 모인 사람들은 따뜻한 감잣국을 앞에 두고 낮게 말을 하고 천천히 그릇을 비워갔다. 나는 그날 저녁 변덕스러운 유행도, 도박 같은 대박 놀음도 없는, 그저 조용한 식당에 앉아 배를 채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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