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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김이택 칼럼] ‘좌파’ ‘정치보복’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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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이택
논설위원


오는 29일이면 촛불시위 1주년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바꿨다. 각 분야의 적폐 청산과 개혁도 진행 중이다. 대통령이 그대로 있는 채 북핵 위기를 맞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하다. 아직도 불안하긴 하지만 이나마 차분하게 유지되는 것도 다 시민들의 힘이다.

새 정부 출범 6개월째, 청산·개혁이 본격화할수록 반발도 커지고 있다. 쇄신에 들어간 사법부를 겨냥한 공격은 파상적이다. 우리법연구회는 30년 전 2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소장 판사들이 만든 단체다. 6월항쟁 뒤에도 군사정권이 임명한 어용 대법원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자 ‘법원의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며 판사들이 나서 결국 대법원장을 바꿨다. 2005년 6월에 이들이 낸 5차 논문집을 최근 들춰봤다.

그사이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사법개혁, 대법원의 기능과 구성, 대법원장의 권한, 법관인사제도 등 사법학’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5차 논문집에도 법관 윤리 등 사법학 분야 8편, 양형 문제 등 형사법 분야 8편, 노동법 6편 등 모두 27편을 실었다. ‘정리해고도 노동쟁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취지의 김명수 당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노동법 논문도 있다. 2011년 출범한 국제인권법연구회 역시 국제법, 인권법에 관심 많은 판사들의 연구모임이다. 사법부가 권력에 휘둘리고 국민 신뢰가 추락하면 소장 판사들이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의 논문이나 행적 어딜 봐도 기존 법체계나 제도를 뛰어넘자는 흔적은 없다. ‘진보’란 호칭도 부적절해 보이는데 ‘좌파’는 더 어색하다.

방송노조도 마찬가지다. 6월항쟁 직후 언론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흐름 속에 공영방송에도 노조가 탄생했다. 이전 정권에 공정방송을 헌납한 인사들이 여전히 경영진에 버티고 있는 상황은 이들을 다시 파업 현장으로 불러냈다. 공정보도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내건 이들에게 굳이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대는 건 부적절하다.

서구에서의 급진·개혁 의미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좌익, 곧 공산당을 연상시킨다. 특히 수구 언론·정당들이 판사모임, 방송노조를 이렇게 불러대는 건 동기가 불순하다. 진보-좌파라 쓰면서 빨갱이라 읽어주길 바라는 저의마저 엿보인다. 실제 수구 언론·야당이 이렇게 떠들면 ‘일베류’나 태극기부대는 대놓고 ‘빨갱이’로 바꿔 퍼나른다.

법원의 독립, 언론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민주화를 위한 각 분야 움직임을 ‘좌파’로 공격하면서 반대편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는 대놓고 편드는 데서 이들의 속내가 드러난다.

최근 속속 드러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의 민주주의 파괴 증거는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보다 심각하다. 이권개입이나 기밀유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청와대·국정원·군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뛰어들어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도를 뿌리째 뒤흔든 방대한 물증이 나왔다. 문화예술 등 각 분야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비판세력을 탄압한 사실도 증거로 드러났다. 우익단체를 동원해 우리법연구회 명단을 살포하는 등 화이트리스트를 이용한 공작정치도 두 정권에 걸쳐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노벨 평화상 취소 청원을 지시하고,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조직하는 등 패륜적 행위도 정권 차원에서 사주했다.

판사모임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방송노조의 시위를 ‘행패’라며 대서특필하는 언론들이 국정농단 이상의 헌정유린 증거는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

대신 박근혜-이재용 석방에 앞장섰다. 박씨는 특검의 소환, 법원의 여러 영장까지 철저히 무시해온 무법자다. 죄질과 태도 면에서 도저히 형사법의 불구속 원칙을 적용해줄 수 없는 전형적인 구속 필요 피고인이다. 그런데도 나라의 품격, 패장에 대한 예우를 언급하며 석방을 주장했다. 최소한의 사과나 반성은커녕 자신을 ‘믿고 지지하는 분들’ 운운하며 사실상 옥중 정치투쟁을 선언한 피고인에게 이제 더이상의 용서·예우는 타당하지 않다. 정치보복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야당 지도자 납치살해를 시도하고, 자기들을 홀대한 보안사령관은 옷 벗겨 삼청교육대 보내고, 국세청 자료 따로 챙겨 표적수사로 전직 대통령 죽음으로 내모는 게 정치보복 아닌가.

국기문란과 민주주의 파괴의 물증이 캐비닛과 컴퓨터 서버에 흘러넘치는데도 ‘가만있으라’면 그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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