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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청춘직설]아무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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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동안 잠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는 게 잠적일 텐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질 수는 없었다. 원체 잔걱정이 많고 벌여놓은 일들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몰래 자리를 비우기 찜찜했다. “잠적은, 한다고 말하고 실행하는 게 아니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친절한 잠적을 감행하게 된 셈이다.

경향신문

언젠가부터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소읍에 도착하는 데까지 반나절이 걸렸다. 숲길도 걷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뜨끈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씻고 나니 활기를 되찾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제 뭐하지?’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어느새 책을 읽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 일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기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책을 펼치고 나서야 그제야 제대로 쉬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김중일의 시 ‘아무튼 씨 미안해요’를 떠올렸다.

이 시에는 외팔이 엽사가 등장한다. 엽총을 잃었지만 엽사는 자신이 엽사라는 사실은 잊지 않는다. “외팔이 엽사는 건조하게 웃는다 웃음은 초원의 모래바람과 함께 금세 흩어진다 아무튼 웃는다 아무튼 말한다”. 사전적으로 아무튼은 “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이란 뜻이다. 아무튼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해본다. 그것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하는 일 앞에 ‘아무튼’이라는 부사를 붙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다음에 쉼표가 따라오면 어떤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도 하겠다는 진득한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고, 쉼표와 더불어 한숨을 돌린 뒤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있다. 아무튼을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일 때 상대의 입술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하게 될 선택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에서 ‘아무튼’으로 가는 여정에는 누구보다 나 자신이 중요하다.

얼마 전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세 명의 출판인들이 의기투합하여 <아무튼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책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날려버린 건 다름 아닌 이 말이었다고 한다. “그래, 아무튼 해보지, 뭐!” 아무튼이라는 말에 담긴 배짱을 엿볼 수 있었다. 시리즈의 포문을 연 다섯 권의 책들을 마주하고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서재> <아무튼, 게스트하우스> <아무튼, 쇼핑> 그리고 <아무튼, 망원동>. 아무튼 안에는 취미, 공간, 그리움, 무엇보다 그들 자신의 삶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삶을 지탱해주는 동시에 삶에서 지탱해나가야 할 것들 말이다.

지난주에 나도 함께하는 사람들과 프로젝트 ‘이씀(IISSM)’을 시작했다. 매달 주제를 하나 선정해서 그에 어울리는 책들을 추천하는 프로젝트다.

첫 번째 주제는 ‘읽기와 쓰기’였는데, 이씀에 참여하는 누구와도 추천하는 책이 겹치지 않아 신기했다. 그동안 틈나는 대로 읽어왔던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추천하는 과정에서도 ‘아무튼’이 개입했다.

아무튼은 실행에 앞선 기우나 노파심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아무튼, 좋은 책이니까. 아무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니까. 아무튼, 책의 힘을 믿으니까.

잠적하고 돌아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잠적했을 때 읽었던 책들을 책꽂이에 다시 꽂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한 일은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이었다. 엽사가 팔을 잃고 엽총을 잃어도 눈의 총기는 잃지 않듯이, 사냥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끝끝내 잊지 않듯이. 다음에 읽을 책을 안고 집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1박2일 동안 가졌던 혼자만의 시간 덕분인지, 다음에 읽을 무수한 ‘아무튼’들 덕분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책이다. 아무튼, 이게 나다. 우리는 모두 아무튼 씨다. 쉼표와 함께 심호흡을 하고 다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무튼 씨다. 아무쪼록에서 시작된 간절함은 아무리라는 담장을 넘고 아무튼이라는 탄력을 받아 아무렴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아무’가 아니게 된다. 아무튼을 발견하는 순간, 아무튼 다음에 쉼표를 찍는 순간.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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