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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선조 시대 북인의 영수 이산해 “소금 생산해 국부 증대”…실용 중시한 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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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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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시대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였던 만큼 선조대에 활약한 참모들은 대부분 특정 당파의 영수였다. 류성룡이 남인, 정철이 서인의 영수였다면 이에 맞서는 북인의 영수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산해(李山海, 1539~1609년)다.

그는 한산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목은 이색의 후손, 토정 이지함의 조카며, ‘오성과 한음’의 한음 이덕형이 그의 사위다. 학문적·정치적 위상을 가졌던 선조의 참모였지만, 이산해는 그동안 북인의 영수라는 이유로 조선 시대 인물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패배한 당파였던 북인의 영수였다는 점 때문이리라.

이산해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대표적인 호 아계(鵝溪) 이외에도 죽피옹(竹皮翁), 종남수옹(終南睡翁), 시촌거사(枾村居士) 등의 호가 있다. 1539년(중종 34년) 이지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산 이씨 집안은 고려 말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이곡과 이색 부자를 배출했고 조선 시대에도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이산해는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선대부터의 세거지(동성동본이 모여 사는 마을)인 충청도 보령을 왕래했다. 6세에는 서소문에 사는 아이가 글씨를 잘 쓴다는 ‘서소문자대필(西小門子大筆)’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561년에는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이산해의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1562년 홍문관 정자에 제수됐으며 명종의 명으로 경복궁 편액을 썼다. 이후 정언, 병조정랑, 이조좌랑 등 젊은 관리가 거칠 수 있는 요직을 두루 지냈다.

이산해가 본격적으로 관료로 활약한 시기는 정확히 선조 시대와 겹친다.

선조는 즉위 후 사림파 출신들을 정계에 적극 등용하면서 소위 ‘선조 키드’를 키워나갔다. 선조 시대를 대표하는 참모인 이이(1536~1584년), 정철(1536~1593년), 성혼(1535~1598년), 이산해, 정인홍(1535~1623년) 등은 모두 1535년에서 1540년에 걸쳐 태어난 인물이다. 선조가 즉위한 1568년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관료로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는 나이대가 됐고 이산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선조대 우리 역사에서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575년(선조 8년)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의 동서분당이 시작됐다. 이산해는 정치권의 중진으로 있었으나, 1577년 6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는 관직에 참여하지 않아 당쟁에서 잠시간 비켜나갈 수 있었지만 결국 동인에 합류한다.

삼년상을 치른 뒤 정치권에서는 그를 찾는 요청이 이어졌다. 선조의 신임도 여전해 대사간, 대사성, 예조참의, 도승지, 부제학에 제수됐다. 1583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해 동인과 서인의 당쟁 과정에서 동인의 핵심인 허봉, 박근원, 송응개 등이 이이를 탄핵하다 함경도 등지로 유배를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제수되는 등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컸다. 당시 이산해가 오래도록 인사권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올라오자, 선조는 “이조판서(이산해)는 순후한 덕을 가졌고 굉장한 재주를 가졌으며, 넓은 아량도 있으며 남다른 충절도 있다”며 반대파의 주장을 일축했다. 1588년 우의정, 1589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마침내 최고의 위치인 영의정에 올랐다.

1589년 10월에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도화선이 돼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다. 기축옥사의 주모자 정여립이 동인이었던 까닭으로, 동인에 속했던 이산해 또한 곤욕을 겪었다.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서인 정철은 정여립 역모에 연루된 자를 거론한 정암수의 상소가 올라오자, “대감은 오늘 이 자리가 불안하겠습니다”라며 노골적으로 이산해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때도 선조는 “류성룡과 이산해 두 사람이야말로 국가의 주석(柱石)이 되고, 사림의 영수가 될 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의지하고 존중하고 있다”며 이산해를 후원했다. 기축옥사는 동인 내에서 남인과 북인이 나눠지는 계기가 됐다. 류성룡과 우성전은 남인, 이산해와 정인홍, 이발 등은 북인으로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이게 된다.

기축옥사 광풍이 몰아치고 난 후인 1591년에는 광해군 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인 정철은 북인 이산해, 남인 류성룡과 함께 선조에게 광해군의 후계 책봉을 건의하자고 약속했다. 당파를 초월한 의사결정이었다. 하지만 이산해는 선조가 후궁인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총애함을 알고, 병을 핑계 삼아 선조를 면담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류성룡 또한 선조를 만나는 자리에는 참석했으나, 정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가 선조가 분노하는 것을 보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발언으로 말미암아 정철은 강계로 유배를 갔고, 서인의 영수 정철의 빈자리를 이산해와 류성룡이 채운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영의정으로 있던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라 개성까지 갔다. 이때 정철의 측근인 서인을 중심으로 이산해가 왕을 피난 가게 한 죄가 크다며 그를 몰아붙였다. 대간의 탄핵이 격렬해지자 선조도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이산해는 결국 영의정에서 물러나 강원도 평해군으로 유배됐다. 평해는 부친 이지번이 1536년 1년간 유배를 갔던 곳으로 부친의 흔적이 남아 있던 장소였다. 유배지에서 이산해는 ‘사동기(沙銅記)’ ‘해월헌기(海月軒記)’ 등 이곳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문학 작품을 썼다. 3년 유배 생활 동안 이산해는 딸과 며느리, 막내아들을 잃는 큰 아픔을 겪었다. 개인적인 아픔이 커서인지 평해에서 이산해는 승려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유지했다. 1595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산해는 기축옥사에 연루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기축옥사는 그에게 늘 정치적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그해 말 휴가를 청해 고향 보령으로 돌아온 이산해는 선조의 거듭된 요청으로 영의정에 복귀했지만 다시 한 번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당시 이산해는 같은 당파에 속했던 홍여순과 대립했는데, 당쟁사에서는 대북(大北) 세력 내의 이산해와 홍여순의 대립을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의 분당으로 파악한다. 이후 이산해는 더 이상 조정에 복귀하지 않았다.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하자, 이산해는 선조 왕릉의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는 것으로서 선조와 함께했던 인연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선조가 죽은 뒤 1년 6개월 후 이산해 또한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산해는 사림 출신으로는 드물게 실용을 중시해 민생 문제 해결에 앞장을 선 관료였다. 그의 실용 사상 형성에는 조선 중기 대표적인 국부론(國富論)자인 숙부 이지함과, 이지함의 스승인 화담 서경덕이 있었다. 이산해의 저술인 ‘아계유고’는 840수의 시문과 상소문이 중심을 이룬다. 조선 중기 학자인데도 성리 철학이나 이론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는 점이 특징이다.

이산해가 이론 문제에 깊이 매달리지 않은 까닭은 주로 국사를 운영하는 입장에 서서 현실 정치를 실용적으로 운영해나가는 데 주안점을 뒀기 때문이었다. 이산해는 시폐차(時弊箚)를 통해 당시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둔전(屯田)과 자염(煮鹽)의 활용을 강조했다.

특히 해안이 풍부한 장점을 활용해 소금 생산으로 국부를 증대할 것이라 주장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호서나 해서의 도서에 소금기가 많아서 경작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비어 있고 땔감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곳곳에 염정과 염조를 설치해두고 또 떠돌면서 빌어먹는 백성들을 모집해서 둔전을 경작하게 하고 대오(隊伍)를 짓게 해 일시에 일을 추진하게 한다면, 처음 일을 시작한 날에 식량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니, 어느 누가 기꺼이 따르면서 참여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소금 생산을 통한 국부 증진은 후대 실학자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선조 시대 이산해는 정치권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당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서분당, 남북분당, 북인 내의 대북과 소북, 골북과 육북의 분당에서 그의 이름은 늘 동인, 북인, 대북, 골북의 중심에 있었다. 이산해가 조선 인물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당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소멸한 점 또한 북인 영수인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매경이코노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29호 (2017.10.18~10.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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