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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편집국에서] 적폐 청산보다 중요한 것 /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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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재성
사회에디터


그날 저녁, 먼저 화두를 던진 건 ㅈ변호사였다. “요즘 국정원 사람들 이렇게 얘기해요. ‘눈앞에 간첩이 있는데 잡지 말란 말입니까? 북한 공작원이 지금 눈앞에서 ○○○을 암살하려고 하는데 언제 다른 기관에 그 정보를 넘기란 말입니까? 그러는 동안 ○○○은 죽어버릴 텐데.’”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 폐지 문제를 두고 요즘 국정원 직원들이 펴는 논리를 소개한 것이다.

그는 거의 국정원 직원으로 빙의한 것처럼 실감나게 말했다. 이어지는 ㅇ교수의 답변.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가진 경우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이제 정상적으로 가야지.” ㅇ교수는 국가권력의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 문제에 천착해온 전문가다. 분단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ㅈ변호사의 회의론과, 적폐 청산 여론이 높은 이번에야말로 정보기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ㅇ교수의 당위론은 마치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처럼 둘 다 그럴듯하게 들렸다.

국정원에 이어 국군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까지 이명박 정부 시절 댓글 조작에 동원됐다는 뉴스가 꼬리를 무는 가운데, 이날 지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주요 내용은 ‘어떻게 하면’ 국가기관들의 일탈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였다. 화제의 중심은 역시 국정원이었다. 서훈 국정원장이 정보관(IO)을 없애고 국내정보 파트를 폐지하겠다고 했는데, 더 중요한 과제는 수사권 폐지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수사권이 살아있는 한 국정원은 언제든 수사를 핑계로 국내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려 들 것이다.

국정원 다음으로 화제에 오른 기관은 기무사였다. 1990년 당시 국군보안사 소속이던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폭로 이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민간인 사찰을 꾸준히 해왔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5년 내내 댓글 조작에 나섰다는 최근 뉴스가 거론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군인 동향을 감시하는 1처를 없앤다고 했지만, 민간인 사찰을 주로 해왔던 3처(방첩담당)의 업무는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윤석양씨 말마따나 “조직은 잘 변하지 않는다.”

주목할 점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으며, 기무사가 한몫을 했다는 사실이다. 고 한단석 전북대 명예교수 간첩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간첩을 만들어내야 진급할 수 있고 조직이 유지될 수 있다면 해당 조직의 구성원은 누구든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어딘가에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최초의 정권교체 이후 2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적폐 청산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적폐를 만드는 구조에 대한 수술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넬슨 만델라의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를 차용해 적폐 세력을 용서했지만, 용서의 전제인 진실 규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권력기구들의 얼굴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기관별 과거사 청산 작업이 시작됐지만,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재편하겠다는 대선 공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도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재편하는 방안에 찬성했다는 사실이다.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받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의를 믿지만, 제도의 뒷받침이 없는 사상누각이었다.

촛불로 마련된 과거 청산 시즌2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여전히 우린 진실규명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히는 데 과도함이란 있을 수 없다.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남김없이 밝혀야 한다.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개혁은 선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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