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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김곡의 똑똑똑] 소멸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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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곡
영화감독


모든 것은 사라진다. …라고 말하는 데에는 모든 것이 사라짐을 거부하려는, 최소한 그 일반화와 중립화로 아쉬움이라도 달래보려는 몸부림이 내포되어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나 모든 사실이 행복하진 않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은 없다지만, 가끔은 그대 이름은 잊어도 좋으니 꽃의 지지 않음을 더 응원하고 싶다.

집이 홍대 뒤편이다. 유흥과 젊음의 용광로 홍대가 지척이라서 금요일 밤이면 몰려드는 그 엄청난 인파에 가끔은 부박스럽기도 하고, 실제로 집 맞은편 골목이 취객들이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명당자리라서 새벽마다 성가시다. 그래도 이 동네를 몇년째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집 뒤편에 나 있는 카페골목 때문이다. 모퉁이 슈퍼마켓 끼고 돌아가면 옴팡진 샛길 따라 카페들과 작은 식당들이 편대비행을 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크질 않다. 게다가 한 집 건너 다른 집으로 모여 있으니, 커피 먹다가 밥집 건너가려면 카페 문턱에서 넘어지기만 하면 된다. 차 두 대가 겨우 비켜서 갈 정도 너비라서 으레 자전거들이 주연이다.

사실 운치나 정취 같은 건 잘 모르는 치다(초딩 때 딱정벌레 밟아 죽이고서 오열하다 그날 밤 꿈에 양철나무꾼을 만난 게 전부다). 하나 나 같은 둔감증자에게도 이 골목 녀석이 매력인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 때문이다. 자주는 아닌 가끔 지나가기라도 하면, 언제나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다. 이발소 간판, 카페 화분, 음. 지난주에 야옹이가 먹다 남긴 참치캔은 아무도 안 치웠군. 관건은 이러한 것들이 지닌 작음과 귀여움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음이다. 그들은 마치 시간을 모르는 듯 산다. 나에게도 큰 의미다. 역시 자주는 아닌 가끔 내 단골 카페에 들르면, 으레 친구 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멤버야 매번 바뀌지만 이번엔 수다의 수준과 지평이 동일하다. 더 큰 것도 더 작은 것도 없음에 나 자신도 스스로를 느낀다. 이건 마치 겁나 달릴 때는 내 숨소리를 못 들어도, 자려고 누울 때 비로소 내 숨소리를 듣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의 무중력 상태 속으로 피신하여, 홍대의 시끄러운 시간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박피해내고, 스스로를 낯설게 하여, 내 숨소리를 확인하는, 그 분할 불가능한 순간이 좋다.

불행은 원하지 않는 손실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이득으로부터 온다고 했던가. 그 카페 앞에 상가건물 하나가 들어서서 땅값 오를까 다들 좋아하던 터였는데, 웬걸. 이 녀석의 키가 생각보다 크니, 맞은편 산 바위와 나무가 가렸다. 배경 좀 바뀐 건데 뭘 하면서 잠깐 안심했으나, 또 웬걸. 상가건물 분양이 끝나고 그 안으로 맥줏집, 삼겹살집, 족발집 들어서기 시작하니 배경이 아니라 공기가 바뀐다. 단지 술 먹으러 몰려드는 손님들이 골목의 부피를 더 잡아먹는 물리적 문제가 아니었다. 더 이상 야옹이도 오지 않고, 화분도 그 선반에서 퇴각하였다. 골목의 소리와 빛, 촉감, 온도, 결이 달라진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내가 사랑했던 녀석은 하나의 풍경이었다. 풍경은 부분과 부분, 전경과 배경의 단순 집합이 아니다. 풍경은 하나의 흐름이고 어떤 균형이다. 풍경에선 점 하나만 달라져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번에 그 점은 상가건물이었다. 시간의 무중력에 시간들이 삽입되고 있다. 이 도시가 질주하는 시간, 그 헐떡거림이.

카페 주인이 카페를 팔기로 했단 소문이다. 이름은 잊어도 좋으니 꽃이 지지 않기를 응원한다. 소멸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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