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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朝鮮칼럼 The Column] 병든 지식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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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에 기웃거리는 폴리페서, 5년마다 관급 R&D 수행 업자

다수결 원리 받드는 포퓰리즘, 대세·유행 따르는 '예능 지식인'

교양은 사라지고 이념만 무성… 지식인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20여년 전 대학교수가 되어 얻게 된 첫 직장은 춘천에 있는 한림대였다. 임용 과정 최종 단계에서 그 대학 총장님 앞에 섰을 때 그는 말문을 이렇게 열었다. "지금 이 자리는 제가 선생님을 심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장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허리 굽혀 악수를 청했는데, 그 순간 나는 감격에 겨워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분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큰어른 정범모 선생이시다.

당시 그 대학에는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원로 교수가 많았다. 어느 날 소박한 환영 모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우리가 든든한 병풍이 될 터이니 교수로서 하고 싶은 거 실컷 하세요." 이어서 당부 몇 가지가 여기저기서 술잔에 실려 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수업이 우선이다, 재물과 권력 앞에 먼저 고개 숙이지 마라, 닭 벼슬만도 못한 게 '중 벼슬'이거늘 선비는 세속의 감투를 멀리해야 한다 등과 같은 것이었다.

사사로운 개인사 한 장면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학가에 나름의 영혼과 품격 그리고 아우라가 남아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리워 해본 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린다. 우선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이른바 '폴리페서'가 너무 많아졌다. 지난 대선의 경우 수천 명이 선거 캠프에 가담할 정도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어용' 지식인이라는 말도, '반체제' 지식인이라는 말도 함께 사라졌다. 정치권에 진입하는 일이 그만큼 흔해졌다는 방증이다.

한편으로 이는 유교 문화가 남긴 학문의 권력지향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또는 작금의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정당정치가 아닌 '캠프 정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교수들에게 선거란 일종의 '장날'이 된 셈이다. 여기에 가세하는 것이 인구 절벽 문제다. 최근 선거 캠프에 지방대 교수가 특히 많이 몰리는 것은 신입생 모집이 구조적으로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비롯된 개인적 생존 전략의 측면이 없지 않다. 이래저래 교수 본연의 일에 충실한 분위기는 확실히 아니다.

대학의 정치화는 용역형(用役型) 학문 체제의 심화와도 연결된다. 목하 대한민국은 유례가 없는 '공정(公定) 사회'가 되었는데, 공무원이 다 정한다는 의미에서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의 업적은 현실적으로 관료 조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관료 사회의 직업적 이익은 그때그때 권력의 선호와 취향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官) 주도 단기 R&D 사업이 시나브로 우리나라 지식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학술 정책이 이념적으로 오염되고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가운데 많은 대학교수가 관변 프로젝트에 재미를 붙인 '지식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언필칭 정보화 시대도 대학의 위상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 자체는 물론 범세계적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IT 강국인지라 대한민국에서는 그 정도가 역시 훨씬 더 심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의 세계에서조차 다수결 원리를 떠받드는 지적 포퓰리즘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 지성'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나 양심과 상관없이 대세나 유행부터 살피는 '여론 맞춤형' 지식인들이 확연히 늘었다. '예능 지식인'의 범람은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내는 모양새다.

지성의 몰락은 사상과 철학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언제부턴가 대학가에는 진보의 목소리만 요란한 채 그 이외의 음성은 묻히거나 숨어 있다.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권력과 학문의 유착 때문이다. '약자 코스프레'에 능숙한 소위 '강남 좌파'가 '개념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학계의 스타로 각광받는 시대다. 이래저래 오늘날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은 교양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에서 출발한다.

생각해보면 1990년대 한림대 교수 사회의 풍경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건 최소한의 기본이었다. 일찍이 근대 학문의 대부(代父) 막스 베버는 지식인 특유의 '내적' 자질을 언급한 적이 있다. 천직으로서의 소명 의식, 구도자적 겸허함, 섣부른 진리에 대한 금욕적 경계, 사실 판단에 대한 무한책임 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 사이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토양도 다르다. 그럼에도 이런 정신과 문화가 있고 없음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만든다. 며칠 전 대학 평가에서 우리는 아시아권에서도 내놓을 만한 대학 하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병든 지식인 사회'로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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