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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청와대와 헌재 사이, 김이수의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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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용광로' 헌재가 政爭의 장으로 추락]

'공석인 헌재소장 조속임명을' 재판관 전원의 공개 반발에도

靑 "입장 비슷" 황당한 답변

헌재 직원들 '외부접촉 금지령'

金대행 "또 시끄럽네" 쓴웃음

조선일보

"외부인은 일절 안 만나고 계십니다."

17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청사 3층에 있는 김이수〈사진〉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집무실 문 앞에서 비서들은 몰려드는 기자들을 돌려보내기 바빴다. 인터뷰 요청이 이어지자 비서진은 "(김 권한대행이) 어떤 입장도 내기 어렵다"고 했다. 헌재 직원들도 김 대행 관련 질문이 나오면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고 했다. 외부 접촉을 삼가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헌재 재판관 8명은 16일 오후 긴급 재판관 회의를 열어 "공석(空席)인 헌재소장을 조속히 임명해 헌재가 온전한 구성체가 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헌재소장을 포함한 재판관 9명으로 헌재가 운영되도록 해달라고 공개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헌재가 바라는 답변은 하지 않았다. 17일 청와대 관계자는 "(헌재 발표는) 청와대 입장과 크게 취지가 벗어나지 않는다"며 "국회가 소장 임기에 관한 입법 미비를 먼저 해소해줘야 한다"고 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조치를 요구했는데 '국회가 먼저…' 하며 떠넘긴 것이다. '동문서답' '궤변'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헌재 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청와대가 문제가 뭔지 뻔히 알면서 고집을 피운다는 느낌까지 든다"고 말했다.

김이수 권한대행은 이날 평소처럼 오전 9시쯤 출근했다. 굳은 표정으로 청사 앞에 있던 취재진에게 아무 말 않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김 대행은 일부 헌재 직원에게 '내가 소장 후보자일 때도 시끄럽더니, 권한대행일 때도 논란이 생겼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집무실에서 헌재 관련 이날 신문 기사들을 꼼꼼히 읽었다. 직원들과 점심을 들면서 "어제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단 사임 뉴스가 (헌재 기사에) 묻힐 만큼 기사가 많이 났더라"고 말했다고 헌재 관계자들은 전했다.

김 대행은 16일 재판관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조속한 소장 임명'을 요구하는 입장문 작성과 언론 배포도 직접 지시했다.

김 대행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청와대와 재판관들 사이에 낀 모양새인 그가 적잖이 곤혹스럽지 않았겠느냐는 말이 헌재 안팎에서 나왔다.

김 대행은 재판관 회의 전에 다른 재판관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자신의 권한대행직 유지 여부에 대한 의견들을 들은 뒤 오후에 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재판관들의 뜻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달 11일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됐을 때 해외 출장 중이었다. 헌재 주변에선 그가 귀국하면 권한대행을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돌았다. 하지만 그가 대행직을 계속 유지하자 일각에선 '내가 아는 김 재판관은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탓하기도 했다. '청와대와 김 재판관 사이에 교감이 있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헌재 고위 관계자는 "다른 재판관들은 물론 김 재판관도 권한대행은 정식 소장이 오기 전에 임시로 맡는 자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고 했다. 다른 헌재 관계자는 "권한대행은 대외업무도 있어서 사건을 배당받지 않는데, 대행이 바뀌면 이를 다시 조정해야 해서 실무적으로도 번거로워진다"며 "이런 점을 두루 감안해 김 대행이 계속 직을 맡도록 재판관들이 합의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내년에 설립 30주년을 맞는 헌재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대형 갈등 사안들을 풀어내며 대법원과 함께 사법부의 양대 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법조계와 헌재 내부에선 갈등 조정 역할을 하는 헌재가 정치적 풍파(風波)에 휩쓸려 정쟁의 장(場)이 된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또 그 원인을 청와대와 여권이 제공한 만큼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청와대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 헌법재판소 국감이 파행한 다음 날인 14일 여당과 친문(親文) 성향 네티즌들이 '힘내세요 김이수'를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린 것 등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헌재 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헌재는 가만있는데 여권이 황당한 논리를 대고 아집을 피우면서 김이수 대행을 희화화시켰다"고 말했다. 헌재의 한 직원은 "제발 정치권이 헌재에 대한 예의를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백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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