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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갈곳없는 아이들, 마트 식품관 돌며 ‘시식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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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집엔 사람도 먹을것도 없어… 대형마트서 노는 아이들

중소도시 저소득층가정 자녀들

시식으로 배채우고 상품 구경

“간식 먹고 놀만한 공간 확충을”


마트는 별천지였다. 먹거리를 손에 든 마트 직원들이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한번 드셔보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정(가명·12)이는 시식대의 키위 두 조각을 연달아 집어 삼켰다.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연정이는 같은 반 친구 은지(가명·12)와 함께 근처 마트에 들렀다. 둘은 거의 날마다 마트에 간다. 오후 2시30분께 학교가 파하면 달리 갈 곳이 없다. “시내는 너무 멀고 놀이터는 지겨워요. 배도 고프고…. ”

새터민인 연정이의 부모는 식당을 운영한다. 그래도 연정이는 “집에 가면 먹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은지의 엄마는 봉제공장에 다닌다. 자동차 수리일을 하는 아버지도 은지를 돌볼 여유가 없다. 연정이와 은지가 사는 임대아파트 단지엔 군것질할 곳도 마땅치 않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편의점에서 컵떡볶이를 먹는다.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 아이들은 단지 옆 대형마트를 찾는다.

마트에선 아이들 나름의 규칙이 있다. 과일, 두부, 소시지·돈까스, 우동, 음료수 등으로 이어지는 식품관을 한바퀴 순례한다. 마트 식품관에 들어서자 두 아이는 말없이 흩어졌다. “모여다니며 시식하면 눈치가 보이거든요. 입맛도 서로 다르고.” 연정이 말했다.

이날 연정이는 소시지·돈까스 등이 즐비한 가공식품 매대부터 달려갔다. 점심을 먹은 지 벌써 3시간이 지났다. 연정이는 시식대 직원이 딴 곳을 보는 틈을 타 동그랑땡 세 점을 한입에 넣었다.

이후 우동·음료수·과자를 고루 맛보고 난 뒤, 연정이와 은지는 다시 만나 문구용품 코너로 갔다. 만화 캐릭터가 새겨진 학용품을 아이들은 ‘눈구경’만 했다. 애완동물 코너에선 햄스터나 이구아나를 쓰다듬으며 놀았다. 마트 놀이는 오후 5시께 끝났다. 그제야 아이들은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으로 향했다.

“마트에서 시간 보내는 아이들이 반마다 한 무리씩 있고, 다른 초등학교 애들도 꽤 있다”고 연정이는 말했다. 마트의 한 직원은 “종종 아이들이 오는데, 분식집도 마땅찮은 이 동네에서 달리 갈 곳이 없으니 오는 것이라 생각해 크게 눈치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놀거리가 마땅치 않은 서울 외곽의 중소도시 대형마트가 가난한 아이들의 놀이터 구실을 하는 셈이다.

연정이가 다니는 학교의 김아무개(27) 교사는 “집에 가도 돌봐줄 이가 없는 저소득층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이 방과 후 마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며 “학교의 방과후 교실은 성적 부진 학생에게 맞춰져 있어 아이들이 좀체 참여하질 않는다”고 말했다.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이은상 교육팀장은 “도심 외곽이나 지역의 아이들이 편히 드나들며 간식도 먹고 놀 수 있는 공간을 확충하고 지원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최유빈 기자 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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