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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도심 속 樂山樂水… 행복이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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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즐거움 / 우리 문화, 즐기는 것 배척 / 베짱이는 실패한다고 생각 / 히딩크리더십 겪으며 깨져 / 미래 위해 현재 희생 옛말 / 욜로족 늘며 생활도 변화 / 남의 시선 아닌 나로 즐겨 / 집 짓는 행위도 마찬가지 / 땅 위에 ‘가족의 꿈’ 실현 / 놀랍고 아름답지 않은가

# 내일보다 오늘을 즐겁게

욜로(YOLO)라는 신조어를 요즘 심심찮게 만난다. ‘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고, ‘너의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더불어 인생을 즐기기로 작심했다고 선언하는 욜로족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덕분에 소비 행태마저 바뀌고 있다는 소리가 나온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 말이 참 신기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동안의 우리 삶이 무척 팍팍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팽팽한 고무줄처럼 너무 당겨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일보

서울 평창동 동쪽 언덕에 지어진 ‘요산요수’. 공사와 행정의 고된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산과 물을 즐기는 집이 완성되었다. 지어진 시기와 공사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집들이 무척 가파른 경사위에 앉아있는 동네의 제일 안쪽에 있었고, 경치가 무척 좋았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둔 시점, 개최국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축구팀의 경기력이 낮으니 남의 잔치가 될 거라는 비관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예상을 뒤엎고 우리의 축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대회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국민들이 전국의 광장에 모여서 한목소리로 응원했던 장관이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광장의 문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이렇게 늘 사람들이 단결이 잘되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를 그토록 열광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준 우리나라 축구팀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 출신의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이었다. 그의 지도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고 강력해서, 지금 경기장에서 뛰는 저 선수가 내가 아는 그 선수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저하게 경기력이 신장되었다.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경기를 즐기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당시에는 좀 특이한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운동선수는 당연히 죽을힘을 다해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달리는 무지막지한 투지와, 경기에 지면 울거나 국민을 향해 사죄하며 주억거리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경기를 즐기고 경기를 지배하라니… 그런 말은 정말 생소했다. 과연 선수들이 정말 즐기면서 경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것이 단지 수사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에서 즐긴다는 것은 나태하게 놀다가 부지런한 개미에게 결국 구걸을 하는 베짱이의 모습이며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굳은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꼭 히딩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무렵부터 우리에게 ‘히딩크식 리더십’이 각광을 받고 인생을 즐겨라, 일을 즐겨라, 게임을 즐겨라 등등 즐기라는 말이 상당히 자주 사용되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하던 지난 시절과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어떤 인생이든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즐겨야 한다. 우리집 가훈은 ‘즐거운 마음’이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날 학교 숙제라며 가훈을 나에게 내놓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우리 집에는 가훈이라는 것이 없었다. 가훈이라는 것이 무슨 가전제품도 아니고 가구도 아닌지라 꼭 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것이 필요한 시간이 온 것이다.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이걸 대충 지을 수도 없는 일이라 첫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처럼 머리를 싸매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후보가 물망에 올랐지만 그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즐거운 마음’이라는 다섯 글자였다. 아이는 공책에 받아 적었고 며칠 후 학교에서 그 글씨가 동판에 새겨진 액자를 집으로 가져와 거실 벽 가운데 떡하니 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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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짓는 즐거움

즐겁지 않은 일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때 그 일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다만 전제는 도덕적이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만 하면 된다. 개미처럼 인내하지 말고 베짱이처럼 현실을 즐겨야 한다. 그런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물론 나는 그 정도로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다.

즐겁다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나의 주체적인 판단이 아닌 사회적인 모델에 기대고 있다. 우리 아이의 성적이 오르면 즐거워지는가, 남편이 승진을 하면 즐거워지는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 오르면 행복해지는가. 대체로 나의 주관보다는 남들의 시선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늘 배고프고 늘 불행한 것이다.

고진감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내도 좋을 수 있지만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많이 참고 있다. 자정이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녀와 가장, 그리고 외롭게 집을 지켜야 하는 주부. 가족 구성원 모두 미래를 위해 인내할 뿐이다. 그러나 그 보상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그런 불확실성에 인생을 투자하는 것이 맞는 행위일까? 계속 그런 의문이 맴돈다.

그렇다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월 새롭게 나온 여린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칠 때, 사람의 진을 빼던 여름이 지나가는 어느 날 아침 시원한 바람이 발가락을 간질일 때,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우리 아이가 배밀이하다가 처음으로 고개를 반짝 들었을 때,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이 있다.

또는 오랫동안 계획하여 떠나는 먼 나라 여행이나 취미로 하는 일에 몰두하는 순간, 혹은 재미있는 소설을 몰입해서 읽는 등 스스로 만드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짜릿한 즐거움은 오랜 시간 노력하고 공들인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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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다. “죽을 수에 집을 짓는다.” “집 짓다 십 년 늙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흔히 우스갯소리처럼 나누지만 건축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표현한 속설이다. 물론 집 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땅을 마련하고 원하는 집의 그림을 그려내고 잘 지어줄 사람을 찾아 세워나가며 가족의 꿈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집을 짓는’ 행위는, 일생에 여러 번 할 수 없는 멋진 일이기도하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즐길 수 있다면 정말 좋은데, 잠재된 욕망과 차가운 현실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일이니만큼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경제적인 문제, 이웃과의 문제, 시공자나 공무원 같은 관계자들 간의 갈등 같은 것을 풀어가는 과정을 즐겁다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인 나에게 건축은 즐거운가? 그렇다. 머릿속에 있는 희미한 구상이 물리적 실체로 서서히 나타날 때, 마치 초음파 사진에서 외계 생명체 같던 존재가 점점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듯한 탄생의 과정이 숨어있다. 그런 존재의 발현은 인간에게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순간이다.

집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 집이라는 구체적인 실체에 담겨질 때의 감동, 그리고 땅이라는 보편적인 환경에 마치 점을 찍듯 자신의 어떤 자취로 만들어지는 경이, 그런 느낌이 집을 짓는 즐거움이며 의미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런 의미와 생각이 시간의 파괴 작용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남을 때의 감동이 더해지면, 집짓기란 인생을 걸쳐 가장 의미 있고 즐거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 산과 물을 즐기다

얼마 전부터 점점 부동산으로서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가족의 안식처로서의 집, 그 본연의 가치를 생각하며 주택 설계를 맡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물론 교외에 나가 자연과 가까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터가 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절묘한 해법을 찾는 사람도 있다. 평창동은 큰 길을 사이에 두고 마치 협곡처럼 두 개의 언덕이 골짜기를 이루며 마주 보고 있다. 서쪽은 북한산을 기대고 있으며 비교적 크고 호화로운 집들이 자리 잡고 있고, 북악산과 인왕산을 기대고 있는 동쪽 언덕은 상대적으로 경사지의 스케일이 작고 오래된 집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다.

그 동네에 집을 짓겠다며 어떤 부부가 찾아왔다. 어쩌다보니 신혼살림을 평창동의 주택에서 시작했는데, 살다보니 동네가 마음에 들어 적당한 땅을 찾기 위해 꽤 오랫동안 발품을 팔았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땅은 평창동 동쪽 언덕에 있었다. 지어진 시기와 공사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집들이 무척 가파른 경사 위에 앉아있는 동네의 제일 안쪽에 있었고, 경치가 무척 좋았다. 사방으로 장엄하게 펼쳐진 북한산의 모습은 중간중간 집의 앞과 옆으로 지어진 연립주택들로 인해 끊어져 있었다. 땅을 보고 나서, 그들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설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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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은 단순했다. 아내는 돌보고 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개(모두 유기되었던 동물들을 어렵게 데려왔다고 한다)가 함께 지내기에 편리한 공간이기를 원했고, 남편은 그리 넓지 않더라도 수영을 할 수 있는 풀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중에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을 2층으로 올리고, 부부의 침실도 식당, 거실 등의 공용공간과 적당히 분리하고 싶다고 했다.

밖을 향해 열린 곳과 닫힌 곳이 너무 명확하고 접근의 방향도 너무나 뚜렷해서 집을 계획하는 것은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집의 덩어리를 기역자로 꺾고, 풀장과 중정을 끼워 넣고 그 안에 작은 뜰을 만들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의 침실들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고, 삼면이 열려 있는 거실로 가는 동선의 중간에 독립적인 주방을 끼워 넣었다.

안방은 후정을 끼고 다양한 풍경을 보며 걸어가는 긴 복도 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침실은 문을 열자마자 어슷하게 연결된 풀장과 곧바로 연결되고, 멀리 북한산의 풍경이 물에 비친다. 그 빛은 다시 방의 천장으로 반사되어 어른거린다. 설계는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언덕 끝자락에 매달린 집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과, 마음 약한 시공자의 느슨한 마무리와, 행정 절차의 이유 없는 지연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늦어지는 일정에도 당차게 해법을 같이 고민하며 흔들리는 기색 없이 버텨낸 건축주의 태도는 무척 놀랍고도 고마웠다.

일이 마무리 될 무렵 전화가 와서, 집의 이름은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집, ‘요산요수’(樂山樂水)로 정하고 싶다고 했다.

왜 안 되겠는가. 어렵고 괴롭고 슬플 수도 있는 여건을 불평 없이 참아내며 심지어 즐겨가며 집을 짓고, 이제는 수확을 앞둔 농부처럼 집에서 살아갈 여러 가지 즐거운 미래를 생각하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 삶을 즐기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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