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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는 ‘제3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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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외부성’ 문제

‘공유지의 비극’이 대표적인 사례

강제력 갖춘 제3의 주체 통한 해결책

정보량·집행비용 등 비효율적일 수도

‘시장 해법’은 소유권·경쟁 강조하나

대부분 공유자원은 소유권 획정 어려워

제3의 방안이라 할 ‘공동체적 해결책’

적절한 유인과 제도가 보완돼야 성공적



[토요판] 최정규의 우울하지 않은 과학

⑩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

한겨레

한 사람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의 이득에 부정적 혹은 긍정적 영향을 주면서도 그에 따라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거나 받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외부성’이 존재한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은 외부성의 좋은 본보기다. 사진은 독일 남서부지대에 위치한 ‘흑림’ 일부의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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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어장에서 그물을 내리고 물고기를 잡는 두 명의 어부가 있다. 두 사람은 각각 10시간 또는 5시간 동안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어장의 규모상 혹은 물고기들의 산란기를 고려하면 두 사람이 각각 5시간씩 그물을 내리는 것이 적정한데, 그렇게 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와 각각 150마리씩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5시간 일할 때 혼자만 10시간 일하면, 10시간 일한 어부는 200마리를 잡을 수 있는 반면, 5시간 일한 어부는 물고기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생산성이 대폭 떨어지기 때문에 50마리밖에 잡지 못한다고 한다. 즉 한 어부가 어장에서 작업하는 시간을 5시간에서 10시간으로 늘리면, 그 어부의 어획량은 50만큼 증가하지만, 5시간 적정시간을 지키고 있는 상대방 어부의 어획량은 100만큼 감소하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모두 10시간씩 그물을 내리면, 두 사람 모두 5시간 일할 때에 비해 어장이 더 고갈되므로 각각 100마리를 잡는 데 그치게 된다고 한다.

한 사람의 작업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사람의 포획량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게 문제다. 5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을 선택하면, 자신의 포획량은 늘겠지만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어획량을 감소시킨다. 그래서 두 사람이 모두 10시간을 선택하면 서로 피해를 주고받아 두 사람 모두 5시간을 선택하는 경우에 비해 포획량이 감소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작업시간을 늘렸을 때 초래되는 피해가 상대방에게 발생하지 않고 자기에게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과도하게 조업한 결과 자신의 포획량이 감소한다면(즉 자기 행동이 초래하는 비용이 자기에게 온전히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작업시간을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위 사례의 문제는 그 피해가 자기한테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돌아가고, 또 그에 따른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경제활동이 다른 사람의 이득에 부정적 혹은 긍정적 영향을 주면서도 그에 따라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거나 받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외부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한 사람의 작업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데도 행위자가 그때 발생하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그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면) 외부성 문제가 대두된다.

엘리너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지 관리>

어부 두 사람이 직면한 외부성의 문제는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의 한 예이다. 주인이 없어 누구나 접근해 공짜로 자기의 소에 꼴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가 있을 때 사람들은 한 마리라도 더 몰고 와 꼴을 먹이려 할 것이므로 공유지는 황폐화될 것이다. 주인이 없어 오염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면, 공기나 하천은 오염으로 범벅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하딘이 말한 비극이다. 이 비극은 불가피한가? 만일 그렇다면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엘리너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지 관리>는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지구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력에 대한 방대한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이 책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 책에서 오스트롬은 국가적 해결 방식, 시장적 해결 방식, 그리고 공동체적 해결 방식을 각각 소개하면서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해법에 따라 공유지의 관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사례와 그렇지 못한 사례들을 분석하고 있다.

첫번째로, 국가에 의한 해결 방식을 보자. 이러한 해결 방식을 지지하는 이들은 공유지의 비극은 사람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기 마련이므로 자신의 행동의 결과 타인에게 생기는 비용까지를 고려할 리가 없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행동의 수위를 조절하는 데까지 이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토머스 홉스가 자연상태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외적 강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처럼, 외부성의 문제도 국가라는 강제력을 가진 제3의 주체의 적극적 개입 및 공적 통제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앞서 어부의 예로 말하자면, 5시간만 일하기로 한 규범을 어길 때 그러한 위반이 가져올 손해의 크기를 산정하여 강제로 벌금을 부과함으로써만 외부성의 문제를 교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어부가 5시간에서 10시간으로 작업시간을 올릴 때, 그가 계산에 넣지도 않고 또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 손해, 즉 타인에게 발생하는 100만큼의 손해를 정부가 조세나 벌금으로 부과한다고 해보자. 이제 비로소 그 어부는 자신의 행동에 따라 발생하는 피해를 정확히 보상해야 하고, 이때 과도한 포획을 통해 얻게 되는 추가적인 이득(50)에 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100)가 더 크기 때문에 10시간으로 올리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중앙집중적 권위체가 누가 언제 얼마만큼 공유지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 이를 위반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강제 부과하는 것, 이것이 국가적 해결 방식의 골자이다.

이에 대해 오스트롬은 이 방식이 그리 효과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해결책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외적 권위체가 공유지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얼마만큼의 작업시간이 적절한지를 계산해내며, 이를 위반할 때의 손해가 얼마인지를 계산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누가 위반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적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외적 권위체가 감시, 적발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정보량을 갖지 못할 가능성,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데 따른 제반 집행 비용 등을 고려하면 국가적 해결 방식이 언제나 효과적이고 경제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이클 테일러는 <공동체, 아나키, 자유>라는 책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국가적 해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국가적 해법은 그 해법이 없을 때의 상태를 홉스식의 자연상태, 즉 모든 이가 이기적이어서 도저히 외적인 강제가 아니고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문제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적 해법이 초래하는 결과라는 것이다. 테일러는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빠져든 것은 그들이 원래 그래서라기보다는 국가의 과도한 개입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국가적 해법은 다른 대안적 해법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침해한 나머지, 국가적 해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도록 만들어 버릴 위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테일러가 국가적 해법에 의해 점차 사라져가는 대안으로 꼽는 것은 호혜성에 기반한 공동체적 대안인데, 그는 재분배, 복지, 사회보장 등을 둘러싼 공동체의 의무와 권한이 점차 국가로 탈취 이양되는 과정 전반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한겨레

배출권 거래제도는 일종의 ‘소유권’ 개념을 도입해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장을 통한 해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사진은 국내 한 화력발전소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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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식은 전형적인 공유재산

두번째 해법인 시장적 해결 방안을 보자.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외부성 문제의 본질은 소유권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 데에 있다고 본다. 자연이 파괴되고 자원이 고갈되는 이유는 자원과 자연이 ‘공유재’로 다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딘의 공유지 비극 우화에 나오는 목초지가 목동들에게 적절히 분할되어 구역별로 소유권이 설정되어 있다고 해보자.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이제 각자는 자신의 구역에서만 소의 꼴을 먹이게 되므로 소 한 마리가 추가될 때마다 발생하게 되는 비용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고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동들은 자기의 구역에서 목초가 자라는 속도를 고려하여 적절한 수의 소만을 방목하고자 할 것이고, 목초의 관리도 적절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기에 적절한 경쟁만 덧붙여진다면 각자는 자신의 구역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기 위해 자신의 구역을 관리할 것이고, 그 결과는 효율적일 것이라는 예상도 덧붙여진다.

하지만 오스트롬이 지적하듯이, 물이나 수산자원과 같은 대부분의 공유자원은 분리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에 소유권을 획정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어장을 구획별로 나눈다고 어장의 물고기가 이와 함께 나눠지는 것도 아니고, 목초지에 구획을 설정한다고 해서 목초지들을 관리할 때 구역별로 영향력이 완전히 차단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구획과 동시에 이전에 없던 외부성의 문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제초나 해충 제거 작업 등 목초지 관리에는 상호 보완적임을 고려한다면 구획을 나누어 소유권을 보장하는 방식의 효과성은 더욱 의문시된다. 또 다른 사례로 인류의 지식의 발전을 생각해보자. 인류의 지식은 하나하나의 노력이 서로 시너지를 발생시키면서 축적되어왔기에 누구의 것도 아닌 전형적인 공유재산이다. 물론 적절한 인용을 통해 지식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절차가 있지만, 지식의 시너지 효과를 생각해보면 모든 지식을 사람별로 잘게 나눠 각각의 기여의 원천을 찾는다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개개인에게 주는 대신 공유자원 전체를 한 사람이 소유하게 된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어장 전체를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독점화되어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효율적인 결과를 낳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두 가지 해법이 공유자원의 관리에는 적용될 수 없거나 혹은 적용될 수 있더라도 비용이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해법이라면, 제3의 길로서의 공동체적 해법은 어떨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러시아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표트르 크로폿킨은 <상호부조>라는 책을 통해 공동체적 해법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걸맞은 자연스러운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자연은 “적자생존” 혹은 “피로 물든 이빨과 발톱” 등으로 묘사되어온 생존 경쟁의 장이 아니었다. 그는 상호부조적 감정이야말로 수십만년에 걸친 집단생활을 통해 그리고 지난 수천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배양된 것이며, “전쟁터에서처럼 사람들이 미쳐돌아가는 상태가 아니라면” 상호부조의 감정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오스트롬은 많은 경우에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상호 감시와 상호 제재를 통한 공유자원 관리가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외적 권위체가 갖지 못하는 정보를 갖고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 상호 신뢰를 기초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규제해가면서 비극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롬의 해법은 표트르 크로폿킨이나 마이클 테일러 등의 공동체주의자를 닮았지만, 그 해법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비공식적 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스트롬이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공공의 이득을 위해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유인이 필요하고 적절한 제도가 필요하다.

구경꾼에서 해결 주체로

또한 동시에 인간은 언제나 개인적 이득만을 위해 행동하는 비도덕적 존재만도 아니다. 그래서 또 한번 적절한 제도가 필요하다. 적절한 제도하에서는 자신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적절한 제도란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외적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강제해내는 장치가 아니라, 상호 신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강제해낼 수 있는 동료 간의 감시 및 견제 장치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은 상대방이 협조하려는 의지가 확인되면 언제든지 이에 협조로 응답하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며, 다른 누군가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자기 일처럼 나서서 이를 제어해내고자 하는 의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기반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누군가에게는 낡은 이념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적 이념으로 여겨져왔다. 사적 소유권이 잘 정의되고, 경쟁이 적절히 보장되며, 국가가 시장의 실패를 적절히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게 전부라는 믿음이 점점 확고해져왔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공동체적 해법의 가능성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쌍두마차가 사회적 기능을 모두 흡수해감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지게 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국가와 시장이 전면에 나서서 우리의 어깨를 홀가분하게 만든 점도 분명히 있겠으나, 또 어찌 보면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서로서로의 갈등의 해결 주체로서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전략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외부성의 문제를 둘러싼 공동체적 해법이란 사람들을 다시금 해결 주체로 세우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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