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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피해자도 엄마도 아닌 ‘개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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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아이 캔 스피크> 배우 나문희


한겨레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배우 나문희가 분한 주인공 ‘옥분’은 단순히 괴팍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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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의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사전정보 없이 온전히 감상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이 글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디 영화는 아무 사전 정보 없이 보러 가는 게 제일 좋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이미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이 풀린 상태다. 우리 중 대다수는 나문희가 연기하는 극의 주인공 나옥분이 깐깐한 성격의 외골수여서 좀처럼 잘못된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그 때문에 구청 공무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마저 그를 어지간히 성가셔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영어를 배우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데, 그 ‘말하고 싶은’ 게 보통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국가폭력과 전쟁범죄에 대한 증언이라는 사실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바 있다. 사전에 주어진 정보값이 존재하니, 관객은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며 극장에 들어선다. 인물이 경험한 비극적 전사가 그를 깐깐하고 고지식한 노인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의 모습이 화면 위에 등장할 것이라고.

29살때 동갑배우 이대근의
엄마 역을 처음 맡은 후
‘노인’ ‘엄마’ 전문배우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지만

냉철한 경영인, 호탕한 재벌
독립하고 싶어하는 엄마 등
평면적 캐릭터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욕망’을 재해석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그런 기대치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옥분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고, 그를 연기하는 나문희 또한 그를 뻔하고 단순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 속 옥분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의 뻔한 예상을 깨부순다. 명진구청에 근무하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는 옥분을 떼어놓기 위해 할머니가 외우기엔 어려울 만한 단어들을 뽑아 쪽지시험을 보는데, 이미 몇 년간 영어를 공부해온 옥분은 주어진 숙제를 그럴싸하게 해내서 75점을 맞는다. 상가 재건축을 위해 조금씩 상가 건물을 훼손하는 건물주는 나이 먹은 노인네가 증거를 잡았으면 뭘 얼마나 잡았을까 하며 방심하지만, 옥분은 현장 사진과 임의 훼손된 건물의 철근이라는 명백한 물증을 들고 구청에 들이닥친다. 옥분이 중요한 결심을 하고는 엄마의 무덤 앞을 찾아가 넋두리를 할 때 관객들은 그가 엄마로부터 위로를 얻기 위해 찾아갔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옥분은 자신이 당한 피해를 위로하고 회복을 돕는 게 아니라 꽁꽁 숨기고 살라 했던 엄마를 채근하고 “돌아가신 엄마보다는 내가 중하다”는 선언을 무덤가에 통보하고 돌아온다. 옥분은 단순히 괴팍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고, 영화는 그런 그를 쉽게 넘겨짚으려던 주변 사람들과 관객에게 그의 진짜 모습을 성실하게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노인’이 되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

옥분에게 선입견을 드리웠다가 그게 보기 좋게 깨지는 경험은 기실 우리가 대부분의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름이나 관절의 노화, 기억력 감퇴 등 노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몇 가지 신체적 특징들은 개인에게서 눈에 보이는 개성을 앗아간다. 그 탓에 세상은 노인을 나름의 성격과 역사를 지닌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는 대신,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노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고는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옥분이 비싼 돈을 들여 등록한 영어회화 학원에서 영어 선생은 나이 든 학생이 부담스러워 옥분에게는 말하기 연습을 시키는 걸 건너뛰고, 20여년간 옥분을 응대해 왔다는 명진구청 직원들은 ‘저 할머니가 그런 걸 지키기나 하겠냐’는 생각에 아무도 번호표를 먼저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다. 하나 영화는 옥분이 민재가 내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른 이태원의 펍에서 서툰 영어로도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민재가 일러준 이후에는 번호표를 뽑아 민원을 넣는 인물로 묘사한다. 우리 자신이 쉽게 넘겨짚어도 좋을 단순한 존재가 아니듯, 노인 또한 단순하게 좋거나 단순하게 나쁜 이들이 아니다. 노인에 대한 쉽고 편한 선입견은 오랜 세월 자신의 나이보다 더 나이 먹은 노년을 연기해온 나문희에게도 드리워져 있다. 스물아홉살 때 동갑내기 배우 이대근의 엄마 역을 했을 정도로 노역을 자주 맡아 연기한 배우였으니, 막연하게 따스하게 안아주고 챙겨줄 것 같은 ‘엄마’의 이미지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것이다. 그러나 2007년 첫 영화 주연작이었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이 개봉할 무렵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나문희는 연기 속 모습처럼 따스하고 자상한 모습을 기대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는 기자의 물음에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사실 사람들이 기대하듯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사람이라서 실수도 하고, 적당히 묵인도 하고 그래요. 사람들은 내가 화를 내는 모습이 없을 줄 알지만, 성격이 다혈질이라 화도 잘 내요. 특히 내가 준비가 안 돼서 마음이 급하면 화가 나죠. 나한테 그런 좋은 면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사실 매우 틀림없는 사람이에요.”(<씨네21> ‘나문희 “나는 사실 매우 틀림없는 사람이에요”’ 2007년 9월3일, 강병진 기자) 10년 전 인터뷰를 새삼스레 가지고 온 건 나문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또한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모든 순간 마냥 좋기만 한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호오와 판단이 선명하게 존재하는 ‘개인’이란 이야기다.

우리는 나문희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주 ‘엄마’라는 수식어 안에 갇힌다. 배우가 펼쳐 놓은 다채로운 필모그래피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 하나의 맥락을 만드는 것만큼 배우를 설명하기 수월한 방법이 드물기 때문이다. 과거 나문희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어쭙잖은 글을 남겼던 나 또한 그랬듯, 그가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의 끼니를 챙기는 행위로 상대의 아픔을 살뜰하게 품어주는 인물로 분하는 모습을 본 이들이라면 ‘엄마’라는 수식어를 고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문희가 묘사한 엄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엄마’의 스테레오 타입에만 갇혀 있지 않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속 국밥 재벌 권순분은 “노인이니까 약할 것”이라는 편견을 뒤집어엎은 채 납치범들을 쥐어박고는 몸값을 내기를 주저하는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에 손수 제 몸값을 500억으로 올리는 호걸이었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 속 나 사장 또한 진헌(현빈)의 엄마인 동시에 무궁화가 다섯개 붙은 특급호텔을 경영하는 냉철한 경영인이었다. 힐을 신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나 사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엄마’라는 단어의 인상을 보기 좋게 깨부순 캐릭터였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 속 정아는 어떤가? 그에게 순종하는 아내와 바쁜 자신들을 도와줄 엄마를 기대했던 가족 구성원의 기대를 채우며 하루하루 살던 정아는, 어느 순간 자신에게도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 이전에 이루고 싶던 욕망이 있었음을 선언하며 따로 집을 얻어 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문희가 연기해온 건 엄마가 아니라, 가정 내에서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이었던 셈이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보라

다시 <아이 캔 스피크>로 돌아가자. 영화는 민재와 옥분이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제관계가 아니라 유사 가족이 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만, 두 사람을 섣불리 엄마와 아들, 할머니와 손자 같은 구도로 묶지 않는다. 옥분은 국가폭력과 전쟁범죄의 피해자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옥분을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일 뿐 결코 옥분이라는 인물을 다 설명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영화는 엄마를, 노인을, 피해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뻔한 고정관념을 배반하고, 조심스레 눈앞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이 탁월한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는 든든히 나문희의 뒤를 받쳐준 이제훈과 전작 <스카우트>(2007)에서 역사를 다루는 태도를 증명한 바 있는 김현석 감독의 공이 크지만, 늘 뻔한 고정관념을 배반하고 ‘엄마’, ‘노인’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던 개인을 섬세하게 묘사해 왔던 나문희가 없었더라면 영화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긴 어려웠으리라. 그리고 이런 탁월한 성취라면, 역시 큰 화면에서 확인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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