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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망설였다, 망설였다… 그리고 위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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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정치학자가 분석한 獨총리 메르켈

통찰력보다는 신중함이 武器

세계 금융위기 등 長考 끝 결단으로 풀어

조선일보

앙겔라 메르켈

매슈 크보트럽 지음 | 임지연 옮김|한국경제신문 | 452쪽|2만원


#1. 1980년대 중반 베를린. 맏딸을 보러 상경한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명문 라이프치히대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논문은 영문학술지에 실렸으며 국가의 가장 권위 있는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27세에 이혼하고 빈집에서 불법 거주 중이었다. 교구민들이 딸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는 말을 흐렸다. "이 집에서 오래 살 생각은 아니겠지?" 아버지의 물음은 딸에게 상처가 되었다.

#2. 2006년 말,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52세의 독일 여성을 선정한다.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그녀는 2006년 정계의 수퍼스타였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도 질세라 그녀를 '올해의 인물' 1위로 선정했다. 실업률은 낮아지고 국민은 독일인임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었다. '유럽의 병자(病者)'였던 독일은 유럽 대륙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 중이었다.

소심해서 위대한 여자

4연임을 노리는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한 평전을 읽어가노라면 한 인간의 현재를 규정하는 건 결국 그의 과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 코벤트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저자는 독일 밖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메르켈의 인생 전반부를 집중적으로 추적한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어떤 이는 위대하게 태어나고, 어떤 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어떤 이에게는 위대함이 맡겨진다." 메르켈은 위대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위대함이 맡겨졌기 때문에 위대해졌다. 그녀는 통찰력보다는 신중히 생각하는 능력에서 빛을 발했다. 메르켈 전에 'Zaudern(망설이다)'이라는 동사는 국정 운영을 논할 때 흔히 쓰이던 단어가 아니었다. 메르켈은 이 단어를 '정치 예술'로 바꿔놓았다.

메르켈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체육 교사가 3m 높이에서 다이빙을 해보라고 했다. 교사는 겁 많은 그녀가 실패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메르켈은 주저하며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로 돌았지만 내려오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웃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수업 종료 종이 울리는 순간 그녀는 다이빙했다. 상황 분석이 끝나자 실행에 옮긴 것이다.

44년 후인 2008년, 독일 총리가 된 그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난제와 맞닥뜨린다. 경제 문제란 어린 시절의 다이빙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낯설었다. 시간 끌며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노련한 정치인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기한이 끝날 무렵 그녀는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독일 정부는 독일 은행의 모든 예금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독일 경제는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메르켈은 존경을 얻었다. 메르켈은 말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면 상당히 용감해집니다. 하지만 약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해요. 매사에 다음 상황을 예상합니다. 소심해 보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조선일보

지난해 9월 기독교민주연합 선거 회의에서의 메르켈 독일 총리. 24일 독일 총선에서 그녀는 4연임을 노리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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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세계시민주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세계시민주의도 이 책이 메르켈을 해석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2015년 말 메르켈은 시리아 난민 수용 정책을 밝힌다. '난민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지지율은 급락했다. 저자는 그녀의 난민 정책을 종교적 신념의 결과라고 풀이한다. 메르켈은 빈곤에서 탈출한 아프리카 난민을 독일이 다 받아줄 순 없다고 했지만 시리아 난민은 다른 문제였다. 잔혹한 IS로부터 도망친 이들을 수용하는 건 기독교인의 도리였다. 저자는 적었다. "그녀는 자아를 되찾은 대신 지금껏 쌓아온 정치적 자산과 호의를 잃었다."(422쪽)

메르켈은 베를린 장벽 동쪽 템플린에서 목사의 딸로 자랐다. FDJ(청년공산주의연맹)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독교 신념이 자리했다. "나는 오랜 세월 장벽 너머에서 살았습니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죠." 2015년 10월 말 EU정상회담에서 메르켈은 이렇게 말했다. 난민에 대한 장벽을 높여달라는 헝가리 총리의 제안에 대한 답이었다. 메르켈이 꿈꾼 '강한 독일'은 제국으로서의 강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본보기가 되는 나라였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쇼비니즘(배타적 민족주의)으로 변질된 '독일 정신'의 순수성을 회복할 희망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 "몇 달 전 나는 EU 정상회담에서 보라색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의 형태로 의인화된 '세계의 정신'을 보았다."(425쪽)

메르켈에 대한 저자의 믿음에 독일은 과연 부응할 것인가. 24일 총선 결과가 그 답이 될 것이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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