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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생의 끝자락… 위트있게 들려주는 인생의 되새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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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 현역 소설가 최일남 ‘국화 밑에서’ 출간

한국 작단에서 여전히 창작을 하는 현역 소설가로는 최고령인 1932년생 소설가 최일남(85)이 열네 번째 소설집 ‘국화 밑에서’(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미당 시에 나오는 완숙한 의미의 ‘국화’가 아니라 장례식장을 장식하는 ‘국화’가 배경이니, 자연스레 노경의 삶과 생각들이 핍진하리라 짐작할 만하다. 단편 7편을 톺아가다 보면 그 예상은 틀리지 않거니와, 시와 달리 소설은 노년에 이르러 창작을 지속하기 힘든 장르여서 그만큼 귀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친구처럼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실버세대의 속사정뿐 아니라 ‘해방의 종소리에 유소년의 잠을 설치고 6·25의 도륙에 혼절한 세대의 되새김질’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세계일보

▲등단 이후 64년 동안 소설 창작에 매진해 온 최일남. 그는 “요즈음 노년소설은 형식이 예전과 많이 다른 듯하다”면서 “나같이 문단 데뷔 초장을 납[鉛] 냄새, 즉 신문사에서 보낸 사람은 더구나 처신이 힘들었다”고 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별 것 아닌 영화 장면에 가슴이 저리고, 껄렁한 슬픔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십상이다. 누선을 자극한다는 따위 덜떨어진 표현을 넘어 잔잔한 감동에 목이 메는 밤이 장난 아니었다. 벌건 한낮이었다면 못 보아줄 궁상이 혼자 노는 야반삼경엔 아무렇지 않다. 가까운 사람의 비통한 현실 앞에 등한하던 위인이, 경조 봉투 한 장에도 상대방과의 친소를 두 번, 세 번 측량하던 물심양면의 구두쇠가 거짓으로 꾸민 당신들의 허황된 이야기를 보고 눈물을 삼켰다.”

노년의 밤은, 그것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지내는 밤은 벌건 한낮과는 다른 세상이다. 새삼스럽게 사소한 것에 감상적인 마음이 되기도 하고, 일찍 잠이 들었다가 야반삼경에 깨어나 ‘연대순으로 찾아들지도 않는’ 회상 중에서 ‘괜찮은 놈 위주로 재음미하거나 베끼려 들면 반드시 언짢은 기억이 선수를 쳐 훼방을’ 놓기도 하니 ‘생각하는 갈대’ 노릇을 마음먹기도 어렵다. 최일남이 노년의 일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밤에 줍는 이야기꽃’의 고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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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국화 밑에서’는 장례식장을 하루에 두 군데나 가야 하는 노인이 그곳에서 또래의 상주와 만나 나눈 죽음과 장례에 대한 풍성한 인문학적 대화를 담고 있다. 노인은 왕년의 직장 동료네 강북의 한 종합병원 빈소에서는 주검을 처리하는 문화의 변화와 고래의 예법을 나열하고 평가한다. 두 번째로 찾아간 죽마고우의 모친 빈소에서는 “개별적으로 지극한 슬픔도 동시다발의 집단 속에 묻히면 제 울음을 못 우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노년의 삶을 다룬다고 위트가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이런 대화. “여보시게. 사는 일이 들쭉날쭉인 터에 사람들의 삶엔 언제는 서론, 결론이 따로 있었다고 믿나.” “안 믿네. 상대가 마누라일 때는 복상사(腹上死)가 절대 없다는 어떤 의사의 말은 믿네만.”

최일남 소설의 묘미 중 하나는 ‘최일남 소설어사전’이 따로 나왔을 정도로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사전에는 다 나오는, 되살려 쓰면 감칠맛 날 것 같은 어휘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점이다. 이번 소설집에도 사전을 뒤적여야 할 ‘어지빠르다’ ‘냅뜨다’ ‘호도깝스럽다’ ‘아시잠’ ‘흥뚱항뚱’ ‘꺽지다’ 같은 우리말은 물론 ‘추음(秋陰)’ ‘칙살’ ‘관형찰색’ ‘어정칠월’ 같은 한문 투에다 ‘스노브’ ‘르상티망’ 같은 예전에 유행한 영어나 불어 단어도 흥미롭게 진설돼 있다. 이를 두고 소설 속에서도 해명을 겸한 문답식 대화가 이어진다.

“그만 그만. 대충 이해하겠는데, 당신의 말엔 한문 투가 너무 많아. 대명천지 인터넷 세상에 무슨 짝인가.” “우리 연배는 돈 주고 배운 공력이 아깝고 그 말과 허물없이 지낸 정의가 하도 깊어 쓰레기통에 버렸던 놈까지 다시 줍는 경우마저 있잖은가. 깨끗이 씻어 새 말에 곁들이면 섞어찌개 같은 맛이 한층 구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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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에서는 배우자를 먼저 보낸 남자 노인의 삶이, ‘메마른 입술 같은’에는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를 매개로 해방공간의 민낯이, ‘아침바람 찬바람에’에는 조손 간의 대화가, ‘스노브 스노브’에는 ‘종생껏 고향을 지킨 괴팍한 지식인의 일대기’를 빌미로 고향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이 고루 담겼다. ‘말이나 타령이나’에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말을 ‘국어’로 강요당한 작가의 생생한 체험담이 흥미롭게 수록됐다.

1953년 ‘문예’지에 ‘쑥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언론인으로 생업을 꾸린 최일남은 폭넓은 인문적 교양과 구수한 문체로 담아낸 삶의 진경은 차치하고, 64년 동안 끈질기게 소설을 써온 것만으로도 한국 작단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작가로 기록될 만하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좀 더 유념한 것은 일본”이라며 “일본어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의 한 사람으로 비망록을 적듯이 썼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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