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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낙규의 Defence Club]인천상륙작전 기여한 특수부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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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전승행사가 오는 15일 월미도에서 개최된다. 인천상륙작전은 6ㆍ25 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실시된 작전이다. 이 작전으로 6ㆍ25 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뒤집는 성과를 거뒀다.

인천상륙작전때마다 거론되는 부대가 있다. 바로 켈로부대(KLOㆍKorea Liaison Office)와 해군 특수첩보대다. '주한 연락처'를 뜻하는 이 부대는 일명 '동키부대', '울프팩부대'라고도 불렸으며 1949년 6월 주한 미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 산하 특수부대로 창설됐다.

국방부는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 64주년을 맞은 2014년 이 부대를 공식적으로 첫 언급을 하기도 했다. 당시 국방부는 "인천 월미도에선 제64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이 개최되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적지에서 첩보 활동을 한 한국군 해군 특수첩보대의 역할이 컸다"고 밝혔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이뤄졌다. 북한군이 남한전역을 점령한 상황에서 적진 한가운데를 급습하는 작전으로 당시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가 인천 앞바다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 당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요청에 따라 함명수 소령,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17명의 대원으로구성된 해군 특수첩보대를 비밀리에 창설했다.

특수첩보대들은 정보수집을 위해 해군 특수첩보대는 1950년 8월 18일 새벽 1시 어선을 타고 부산항을 출발 6일만인 8월 24일에 서해 영흥도에 도착했다. 첩보대원 함 소령은 첩보작전의 거점인 영흥도에 상륙하기 직전에야 대원들에게 작전의 목적과 구체적인 임무를 알려줬다.

특수첩보대 대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인천과 서울, 수원을 왕래하면서 첩보 활동을 펼쳤다. 이들이 입수한 정보는 항공사진 촬영이나 통신장비 감청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 전, 특수첩보대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철수 준비를 서두르던 새벽 2시, 첩보 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했다. 당시 11명의 대원들은 철수하고, 영흥도에는 임 중위와 홍 하사 등 6명의 대원만 남아 있었다.

정규작전을 수행할 무기를 갖추지 못한 첩보대원들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임 중위와 홍 하사가 적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해안에 정박 해 둔 마지막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두 사람은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의 전모가 탄로 날 수 있다고 판단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미 극동군사령부로 송신돼 인천상륙작전의 세부계획을 수립하는데 반영됐다.

이 첩보부대를 도운 부대가 바로 켈로부대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군으로서 중공군과 북한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 수집 및 후방 교란, 방해 공작, 양민 구출 등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켈로부대는 북한 실정에 밝고 연고가 있는 북한 출신들로 채워졌다. 1951년 8240부대로 확대 개편됐다. 정전협정 후에는 미군 소속에서 우리 국방부 소속으로 이관되었다가 1954년 해체됐다. 특전사의 모체가 됐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 군함이 무사히 인천만에 상륙할 수 있도록 KLO 부대원들이 북한군으로 위장 침투해 적이 도처에 설치한 기뢰를 찾아내고, 적진의 해안포 위치, 병력 규모, 바다의 상태와 항로의 수심을 측정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하는 X-RAY 작전을 그리기도 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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