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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DMZ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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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청년 농부 박선현 인터뷰

그을린 얼굴. 검은색 야구모자. 축구복 상의와 조금 걷어 올린 트레이닝 바지. 흙 묻은 신발과 흰색 토시. 탄탄한 근육이 붙은 몸. 일터에서 몰고 온 진흙 묻은 자동차. 심하지 않은 강원도 사투리.

인제군 원통버스터미널에서 만난 박선현의 첫인상이다. 올해 스물셋의 이 청년 농부가 사는 곳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냇강마을이다. 냇강마을은 백두대간과 소양강 지류인 인북천(냇강)을 끼고 있다. 휴전선과의 거리는 불과 20km다. 38선 이북에 위치해 해방 직후에는 북한의 관할에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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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농부 박선현(왼쪽)과 박수홍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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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강마을은 2009년 농림수산식품부가 주최한 ‘제8회 농촌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최우수 농촌마을로 선정됐다. 당시 이장이었던 박수홍씨가 이뤄낸 성과였다, 박수홍씨가 그의 아버지다. 박수홍씨는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석사까지 받았으나 농부가 되기 위해 돌아왔다. 화가난 할아버지는 2년 동안 아버지와 겸상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엔 자랑스러워 하셨다고 한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이 그 뜻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마을이 바뀌려면 100년은 걸려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전공했던 자신과 달리 아들은 아예 처음부터 농업을 전공해 그 지식을 활용하길 바랬다. 아버지가 지어준 ‘선하게 빛나는 햇빛’이라는 뜻의 이름 ‘선현(善炫)’에도 이런 바램이 담겨 있다. 햇빛이 없으면 농업이 불가능한 것처럼 마을발전에 큰 보탬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냇강마을도 우리나라 농촌에 닥친 ‘지방소멸’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30년 내 한국의 지방자치단체 중 79곳은 소멸위험에 처해있다. 인제군은 소멸위험에 속하지는 않는데, 그건 인제에 거주하는 젊은 군인들 때문에 그럴 뿐이다. 실제로 냇강마을에 30대는 아무도 없으며, 20대는 그를 포함해 3명이지만 나머지 둘은 군인이다.

“품격 있는 농촌을 만들고 싶어요.” 대를 잇는 두 농부의 꿈은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리하면 마을은 살아남을 것이고 사람들은 농촌을 찾을 것이다.

그는 농업대학에 재학 중일때 유럽의 농촌을 둘러봤다. 런던 외곽도로를 따라 늘어선 농촌들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보면서, ‘품격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한국 농촌은 지저분하고 불편했다.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을 어른들을 설득해 들꽃 재배, 정원 가꾸기 사업 등을 기획했다. 처음에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핀잔을 들었지만,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손수 들꽃 재배와 정원 가꾸기에 앞장서고 있다. 체험마을 사업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마을이 더없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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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학기제 프로그램에 따라 냇강마을을 찾은 학생들이 저수지의 수생식물을 관찰하고 있다. 출처: 냇강마을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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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최근 그는 마을주민들과 블루베리 밭을 가꾸고 있다. 농촌마을이 더 이상 작물재배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블루베리 묘목을 땅에 바로 심었지만, 커다란 마대 자루를 묘목화분으로 만들었다. 작은 묘목이 차지하는 땅이 너무 많은데다, 외지인을 대상으로 한 블루베리 재배 체험사업에도 불편해서 화분을 생각해냈다. 그러면 체험용으로 배치하기에 용이한 한편, 묘목이 화분에서 자라는 동안 밭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30분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12시부터 5시까지 쉬었다가 다시 저녁 8시까지 일한다. 한낮은 더위 때문에 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겨울 농한기를 제외하면 그의 일정에 휴일은 없다.

그에게 DMZ가 지척이기에 갖는 어려움을 묻자 오히려 “커다란 기회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DMZ이기에 더 많은 방문객이 올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더 많은 손님은 더 높은 수준의 마을 발전을, 마을의 발전은 곧 지역사회의 회생을 의미한다. “마을은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죠. 찾아주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인제가 금강산 가는 길의 길목임을 생각한다면, 통일 이후의 전망은 더욱 밝다.

그의 집에는 책이 가득했다. 겨울 농한기 아침에 거실 통유리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면 저절로 책이 읽힌단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스콧 니어링 자서전>(원제 The Making of Radical)이다. 1883년생인 스콧 니어링은 미국을 대표하는 평화주의자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미국에서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던 사회주의자다. 그가 니어링을 좋아하는 것은 니어링이 설파했던 이웃의 중요성, 마을 단위의 연대, 평화적 공존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고향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한 확고한 방침이 서 있었다.

그래도 문제는 늘 있다. “마을 사업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지속될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아버지가 그랬듯 그는 멀리 내다보며 냇강마을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제/추재훈 한겨레평화연구소 청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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