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6 (목)

이회창 “文 정부의 ‘나라다운 나라' 슬로건은 내 창고에서 가져다 쓴 것”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회창 회고록(2권)' 출간한 이회창 전 총재, 육필로 3,800매 넘는 기록 남겨
“전문 작가 손질 필요 없는, 명문장… 판사의 판결문처럼 명료해, 출판 결정"
출판 간담회에서 현 정치 상황 질문 쏟아지자, 거침없이 의견 피력
“文 정부의 ‘나라다운 나라' 슬로건은 내 창고에서 가져다 쓴 것”
“문 대통령이 말한 ‘집단 지성'은 예외적 표출로 그쳐야, 대북문제는 더 단호하게"

조선비즈

‘이회창 회고록’ 출간을 기념한 자리에서 발언 중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82세)./사진 제공=김영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기 직전 까지, 연거퍼 세 번의 대권 도전 실패 후(15대, 16대, 17대) 정치사에서 사라졌던 이회창 전 총재가 개인의 삶과 정치인으로서의 파란만장한 기록을 담은 자서전 ‘이회창 회고록'을 발간했다. 1996년 이 전 총재의 ‘아름다운 원칙'이라는 에세이를 발간했던 김영사가 출판을 맡았다.

출판사 측은 이 전 총재로부터 올해 3월 “원고가 마무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으며 “연필로 직접 쓴 육필 원고가 3,800매가 넘었다"고 설명했다. 김영사 관계자는 “보통은 전문 작가의 손길을 거치는데, 이 전 총재의 글은 판사 시절 판결문을 연상하듯 정확한 명문장으로 출판 가치가 선명했다"고 한다.

1권 나의 삶 나의 신념 2권 정치인의 길. 총 1040페이지, 두 권으로 구성된 책은 ‘목침'으로 써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한다. 정치인의 회고록이 자기중심적 변명의 역사관으로 ‘민폐'를 끼친다는 출판 시장의 비판을 인식한 듯, 이 전 총재는 최대한 객관성을 담았고, ‘자랑하는 듯한 ' 서술 태도는 지양했다고 밝혔다.

시기적으로 문재인 정부 100일 시기에 맞춰, ‘과거 보수 정당의 수장'의 회고록이 나온 상황인데, 출판 시기에 관해서는 디자인 일정에 맞춘 것일 뿐 정치적인 고려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 22일, 출간과 함께 마련된 기자 간담회 자리에 나타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여러 질문에 답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생각보다 판이 커진 것 같다"며 다소 긴장했듯 했으나, 관록의 정치인 출신답게 선명하게 ‘보수주의자'로서의 견해를 밝혔다.

자신이 사법부와 행정부, 입법부를 두루 거치고 정당의 대표와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건 특별한 혜택이기에, 성공이든 실패든 살아온 과정을 보고할 의무를 치르고 싶었다고 했다. 대권에서 패배한 야당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도는 일종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선전포고다.

조선비즈

1권 나의 삶 나의 신념 2권 정치인의 길로 구성된 ‘이회창 회고록'.




회고록은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을 비롯한 ‘이회창 3대 의혹 사건'에 대한 해명과 더불어 피해자 입장에서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정치이면'을 기술하는 데 중점을 뒀다. 3김 정치에 대해 그는 ‘그분들의 정치적 능력과 경륜은 높이 평가하지만, 야당을 압박해 정치를 어렵게 만드는 수법은 민주주의를 외면한 과거 정권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회고록에서 ‘대통령이 될 줄 모르고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켰다고 소개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을 두고, 박 전 대통령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창당했던 당사자로 침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정리하면서 반대쪽에 있는 분들을 비판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은 잃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유명하지 않아 걱정”이라며, “출판사 입장을 헤아려주기 바란다"는 말로 저자로서의 노파심도 드러냈다.

다음은 이회창 전 총재와의 일문일답이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았다. ‘나라다운 나라'라는 슬로건은 현직 시절, 이 전 총재도 쓴 적이 있는 거로 알고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인데, 문 정부의 100일을 어떻게 평가하나?

“보니까 내 창고에서 막 가져다 썼더라고(웃음). 도움이 되면 내 창고에서 다 가져다 써도 좋다. 100일이 좀 지났으니 얼마 안 됐고,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보이는 게 사실이다. 본격적 평가보다 좀 기다려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걱정스러운 대목은 너무 홍보하는 데 치중하는 인상을 준다. 정치인은 지지율 지켜내는 게 당연하지만, 100일 만에 국정보고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말을 자꾸 바꾸는 건 좋지 않다. 장기적인 국가 정책을 즉흥적으로 공표하기보다 크게 보고 가야 한다. 원전 문제도 당장 시행할 것처럼 하다가 6년간 검토한다고 하면 국민이 불신하고 불안해한다.”

이 전 총재는 취임 100일 보고에서 문 대통령이 언급한 ‘집단 지성'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촛불 민심과 함께 가겠다며, 간접민주주의가 그동안 문제가 있었다는 식의 언급은 독단이라는 것. 그는 자신이 ‘회고록'에서도 언급했듯, 광장의 집단 민심 표출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어야 하며, 항시적으로 상례화될 때는 국정 운영이 틀이 깨진다고 주장했다.

이어 “광장의 집단 민심에 따라 국정이 좌우되면, 법치주의에 반하는 것이다"라며, 문 대통령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정리했다.

조선비즈

이회창 전 총재는 대법관, 중앙선거관리 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를 거쳤다. 대법관 시절 원칙에 입각한 소신 있는 판결로 ‘대쪽 판사'로 불렸다. 1981년 대법관실에서./사진제공=김영사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한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

“회고록은 자기를 까발리는 것이다. 훼손도 명예도 동시에 있다. 어찌 됐든 내 변명이나 해명이 없을 수 없다. 게다가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면 망설임이 없겠지만, 사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구질구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느 날 ‘다산 정약용과 형제들'이라는 책을 읽고 마음을 바꿨다.”

다산 정약용 일가는 서학 사건으로 큰 부침을 겪었다. 정약종은 천주교도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됐다. 18년간 귀양살이를 끝낸 정약용이 쓴 책들을 보며, 이 전 총재는 ‘승자에 의해 버려질 뻔했던 정약용의 역사가 후세에 큰 귀감이 되었듯,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나와 함께 동지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아니면 누가 하겠나.”

-대법관을 지낸 분으로, 얼마 전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김명수 후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는 항간의 우려는 어떻게 보나?

“이거 회고록 얘기는 어디 가고 정치 얘기만(웃음)... 지명된 분은 제가 같이 근무한 적도 없어서 잘 모른다. 활동 경력이 좌파로 편향됐다는 점에서 찬반양론이 나오는 모양인데, 평가는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보편타당한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다. 자신의 성장 배경이나 교육 환경에 선입견 없이 역할 수행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대법원장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탄핵 사태 이후 보수는 외면받고 있다. ‘회고록'에서 ‘보수는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재 야당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는가?

“현재 자유한국당과 바른 정당에 관한 부분을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보는 나도 안타깝지만, 두 당이 싸우면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어쨌든 정치는 스스로가 뒹굴면서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누가 코치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진심으로 방향성을 갖고 길을 모색하면 열릴 것이라고 본다.”

조선비즈



-당시 DJP(김대중 김종필 연합) 연합이 선거에서는 승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 정계 개편을 위한 야당의 연합 가능성은 어떻게 보고 있나?

“연합이 당선되기 위한 묘수일 수는 있지만, 정치공학적으로 이롭다고 해서 표만 합치는 것은 당장의 효용에 함몰되는 것이다. 눈앞에 손실이 있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는 큰 선거를 앞두고는 합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합당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야당의 모습을 털어내면서 정리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정치는 여야나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건전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정치인은 누군가?

“그건 말하기 어렵다. 지혜를 발휘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국민이 왜 보수에 실망을 했겠나? 답은 간단하다. 보수가 포퓰리즘에 좌우되지 않고 우직하게 가는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건 대북관계다. 거기서 눈치 보며 태도를 바꾸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근본주의만 주장하기보다, 합리적이고 확고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어떻게 보고 있나?

“김정은 핵을 절대로 축소하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 오히려 더 고도화시킬 것이다. 그런 김정은이 북반부를 점령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다른 강력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북한이 핵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포기하겠다’는 생각도 위험하다.

핵이 다가 아니다. 북한은 재래식 무기도 막강하고 화학무기 전력은 세계 1위다. 핵을 동결했다고 한반도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북핵 문제 하나 없애자고 한미동맹을 깨자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 친미와 반미의 성향을 넘어서서 한미동맹은 우리의 울타리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했을 때를 레드라인’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오해받을 수 있는 발언이다. 문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을 얘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는 방어권에 관한 예로 이스라엘을 들었다. 적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스라엘은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쏜 미사일을 거의 다 떨어뜨릴 만큼 방위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이 전 총재는 “이스라엘처럼 자체 방어능력을 갖추는 게 급선무다. 그러려면 방산산업에 분야의 부정부패에 철저한 감시와 관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자위 능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은 정치평론가가 아니라고 전제를 달았지만,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각 정치적 사안에 대해 보수주의자로서 ‘정치한' 설명을 이어갔다.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보수 대표로 이회창을 다시 추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이 오갈 정도.

한편 그는 회고록 집필 후 인쇄를 기다리며 “부족한 나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에 자신 있나”하는 예상치 못한 자문에 시달렸다며, “경험한 것을 신념에 맞게 쓴 만큼 겸허하게 독자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했다.

이회창 전 총재는 대법관, 중앙선거관리 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를 거쳤다. 대법관 시절 원칙에 입각한 소신 있는 판결로 ‘대쪽 판사'로 불렸다.

김지수 기자(kimjisu@chosunbiz.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