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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표적 항암제·연료전지 연구 급한데…기초과학 연구 퇴보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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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원자로 '하나로' 3년째 중단 ◆

매일경제

지난 17일 대전시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만난 오수열 하나로이용연구단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는 한국 기초과학의 자부심인데 하루가 다르게 위상이 약해지고 있다"며 "섣불리 100%라고 말할 수 없지만, 99% 이상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데 얼마나 안전해야 시민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할지 답답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2014년 7월 가동을 멈춘 지 3년1개월, 이날 찾은 하나로는 높이 13m의 어두컴컴한 수조 속에 방치돼 있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30㎿의 열을 내뿜으며 주위를 푸른 에메랄드 빛으로 밝히던 원자로였다. 표적 항암제 등 혁신 신약과 첨단 반도체의 원료가 될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느라 하루 24시간 바삐 돌아갔다. 통상 3500~4500㎿의 열을 뿜어내는 원자력발전소에 비하면 열 출력은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연구용이지만, 핵분열로 중성자를 만드는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보고'였다. 수조를 가득 채운 물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열을 식히고 유해한 방사선을 차단했다.

하나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매년 700명에 달하는 국내외 기업, 병원, 대학 연구진이 줄 서서 모여들던 인기 시설이었다. 1995년 2월 8일 첫 임계(원자로에서 외부 도움 없이 핵분열 연쇄반응이 지속되기 시작하는 현상)에 도달해 20년 가까이 운전하는 동안 1000여 개 기관의 연구자 8000여 명이 하나로를 이용했으며 멈추기 직전인 2014년 상반기에만 450명이 추가로 다녀갔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하나로에서 생산된 냉중성자를 활용해 나노미터(㎚) 크기 물질 구조를 분석하는 '중성자산란 연구시설' 역시 2001년부터 10년간 투입된 돈만 1000억원에 달하지만 문을 닫아야 했다. 건물 짓는 데만 180억원, 시설장비를 갖추기까지 800억원가량이 들어간 최신 연구 거점이 그대로 잠자고 있는 셈이다.

이창희 원자력연구원 중성자과학연구센터장은 "우리나라 중성자 연구시설은 원래 인기가 매우 좋아 1년에 하나로가 돌아가는 200일 중 170일 이상을 국내외 이용자에게 개방했다"며 "일본 타이어 제조기업 스미토모는 하루에 650만원씩 내고 연구시설을 빌렸을 정도"라고 말했다.

매일경제

대전광역시 원자력연구원에 있는 국내 유일의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3년째 가동을 멈추고 있다.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운행 정지가 장기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원자력연구원]


그러나 하나로가 운행을 중단하면서 지금은 역으로 국내 연구진이 호주, 일본 등으로 건너가 건당 약 5만달러를 내고 연구용 원자로를 빌려 쓰고 있다.

최성민 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장(교수)은 "학위과정을 밟는 석·박사 연구원에게는 3년도 긴 시간"이라며 "학생들이 연구를 포기하거나 방향을 전환하든지, 외국에 나가 실험시설을 빌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를 지속하려면 '국외행'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라는 뜻이다. 그는 이어 "국방과 연계된 항공기 연구나 연료전지 연구처럼 산업적 가치가 큰 경우 보안이나 기술 유출 위험 때문에 해외로 가기도 어렵고 사실상 '올스톱' 상태"라며 "이런 식으로 국가적 연구 기반을 닦지 못하고 학생들이 이탈하면 3년 이상 후유증이 남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연구원 측은 올해를 '골든타임'으로 보고 때를 놓치면 뒤늦게 하나로를 재가동해도 장기적으로 연구가 침체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 단장은 "정부나 연구재단 등에서 어렵사리 지원을 약속받고 시작된 연구과제가 이제는 연구비를 빼앗길 위기"라며 "정부 입장에서도 하염없이 예산을 붙잡고 기다릴 수만은 없기 때문에 올 9월까지 가동이 재개되지 않으면 용도를 다른 곳으로 돌리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회를 놓치면 3개년이나 5개년짜리 프로젝트가 통째로 날아가기 때문에 올해만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향후 수년을 버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예전 같으면 연구원들이 한창 방사성 동위원소를 조작해 비파괴 검사장비 등을 만들고 있어야 하는 연구동도 텅 비어 있었다. 하나로가 국내 방사선 동위원소 수요의 70% 이상을 충족해 왔는데, 이제는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암 세포에 달라붙어 갑상샘암, 희귀 소아암을 치료하는 방사선 동위원소 의약품도 해외에서 사들이고 있다.

연간 200여 명의 희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쓰이던 '요오드(I)-131'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주사 한 번을 맞는 데 3000만원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방사선 동위원소인 루테슘(Lu)-177 역시 생산이 중단됐다.

이준식 동위원소연구부장은 "요오드 용액은 3㎖가 3000만원을 호가하고 눈물 4분의 1 방울의 양만으로 환자들이 병원에서 몇백만 원을 부담해야 할 정도로 귀하고 부가가치가 큰 약"이라며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는데 해외에서 사오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이모성 청주대 교수는 "갑상샘암 치료에 사용되는 요오드는 반감기가 8일밖에 되지 않아 수입한다고 해도 금방 중간에 없어진다"면서 "또 국내 생산 때보다 가격이 비싸지기 때문에 하나로 중단은 환자 부담으로 전가되고 수급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중성자 연구가 태양전지, 배터리 등의 효율을 높이는 데도 쓰이기 때문에 신재생에너지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풍력발전, 태양열 발전, 전기차 등의 전력변환장치로 쓰이는 '중성자 핵변환 도핑(NTD) 반도체' 원료도 하나로에서 생산된다. 탈원전을 위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위해서도 연구용 원자로가 필요한 셈이다.

[대전 = 김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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