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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죽기 전 푸코가 매달린 ‘비판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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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82·1983년 미국·프랑스 강연록 출간

푸코 후기 사유의 대표 개념 ‘파르헤지아’

주체의 윤리적·철학적 실천에 관심



한겨레

담론과 진실-파레시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옮김/동녘·1만8000원


미셸 푸코(1926~1984) 후기 사유의 고갱이를 담은 강연록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담론과 진실>은 1982년 5월18일 프랑스 그르노블대학에서 했던 ‘파르헤지아’란 제목의 강연과 1983년 10월과 11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담론과 진실’이란 제목으로 행한 여섯 차례 강연을 담은 책이다. 미국에서 했던 강연 내용은 2001년 <두려움 없는 발언>(Fearless Speech)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나, 푸코의 발언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르노블대학 강연록은 2012년 학술지에 처음 공개됐다. 지난해 프랑스에서 발간된 이 책은 푸코의 수고를 싣고 정확한 주석을 다는 등 당시 푸코의 발언을 온전한 맥락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말년의 푸코는 고대 그리스 문헌들에서 나타나는 ‘파르헤지아’란 개념을 천착했다.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마지막 3년 동안 펼친 <주체의 해석학>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 <진실의 용기> 강연들에도 파르헤지아 개념이 중심에 있었다. 푸코는 “파르헤지아에 대한 탐색을 통해 ‘비판적 태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의 계보를 살펴보려 했다”고도 말하는데, 무엇보다 주체와 진실 사이의 관계가 그의 핵심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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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미셸 푸코(오른쪽)가 프랑스 법무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감자들의 권리 보호를 요구하는 ‘감옥정보그룹’(GIP)의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은 장폴 사르트르. 엘리 카간 사진, michel-foucault.com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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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첫 강의에서 푸코는 파르헤지아의 개념을 단계적으로 좁혀간다. “모두 말하기”를 어원으로 삼는 파르헤지아란 기본적으로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생각하는 자”라는 것을 숨김없이 밝히는 행위다. 이를 행하는 ‘파르헤지아스트’가 말하는 내용은 스스로 진실이라 믿으며 실제로도 진실이다. 그런데 진실은 언제나 말하는 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 위험은 자신이 언명한 진실이 대화 상대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파르헤지아 자체가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또 파르헤지아는 말할 자유일 뿐 아니라 말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푸코는 “분노와 관용, 아첨과 파르헤지아가 맺는 네 항의 관계”를 기억해두라고 충고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분노를 쏟는다. 분노는 약자의 아첨을 부른다. 아첨의 반대가 파르헤지아다. 관용은 분노를 제한하고 파르헤지아에게 공간을 열어둔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르헤지아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일 뿐 아니라 윤리적 태도, 삶의 기술, 더 나아가 철학 담론의 본질까지 포괄했다. 특히 아테나이 민주정 시기 파르헤지아는 개인으로서의 시민과 전체·공동체·민회로서의 시민들 사이에 위치하여 “헌법인 동시에 개인의 태도”로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민주정의 위기는 이런 파르헤지아의 개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모두의 발언을 평등하게 인정하는 민주정 속에서, 어떤 사람이 진실을 말할 능력과 권리를 지니는지 결정할 수 없는 어려움이 불거진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서는 ‘마테시스’(배움과 지식)가 빠진 ‘나쁜’ 파르헤지아에 대한 경멸적 표현이 등장한다. 민주정을 떠받치는 공적인 그릇이었던 파르헤지아는 점차 개인의 자질이나 실존의 선택과 연관되는 것으로 변화했다. “‘로고스’(참된 말, 진실) 사용의 자유가 점차 ‘비오스’(삶)를 선택할 자유가 되어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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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는 말년에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을 통해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주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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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르헤지아는 과거의 정치적 장에서 벗어나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장에서 전개된다. 새로운 파르헤지아의 목표는 “시민들이 그들과 그들의 도시국가를 위해 최상의 결정을 내리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하고, 또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 된다. ‘로고스’와 ‘비오스’의 조화를 위해 타자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크라테스의 파르헤지아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푸코가 파르헤지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큰 주제, ‘자기 돌봄’이 나타난다. 파르헤지아는 ‘너 자신을 알라’(자기 인식)는 명제를 넘어서 ‘너 자신을 돌보라’(자기 돌봄)는 명제까지 충족시키는 삶의 실천적인 태도다. 여기서 ‘자기 돌봄’을 단순히 자기 내면에 몰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푸코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에서만, 파르헤지아의 의무를 지는 타자의 도움을 받는 조건에서만 사람들은 자기를 배려할 수 있고 자기를 돌볼 수 있다”고 말한다. 파르헤지아는 ‘자기 돌봄’을 위해 꼭 필요한, 타자와의 게임 같은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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