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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전쟁 ‘레알리테’ 없는 그림 보고 ‘굿바이 피카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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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30) 부산 피난 시절과 ‘피카소와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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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피카소가 파리의 살롱 드 메에 출품한 <코리아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프랑스 공산당원이던 피카소가 기관지 <뤼마니테>에서 보도한 1950년 10~12월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을 계기로 그린 작품이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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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민족의 수난기이기는 했지만 생애를 통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피난 시절이었을 것 같다.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은 어떻게 했는가?

“나는 1951년 1월1일 부산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때 인천을 떠나, 제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니, 새해 정월 초하루였다. 하지만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중앙동의 삼촌(김건영) 집을 찾으니 친척들 다섯 세대가 이미 들어 있었다. 겨우 비집고 우리 가족이 들어섰는데, 난데없이 윤중식이 들어왔다. 한 지붕 다섯 세대의 피난살이여서 도저히 윤중식 가족까지 받아줄 형편은 아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이후 같은 평양 출신 화가이면서도 윤중식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기야 예술가들은 자기중심적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불평하는 사람이 예술가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남관은 ‘김 선생 믿고 도망가지 않았는데, 국군은 언제 들어오느냐’ 따지기만 했다. 국군이 들어오지 않는 게 어찌 내 책임이란 말인가. 윤중식과 남관은 원래 나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전쟁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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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1일 김병기는 가족과 함께 부산역 앞 중앙동에서 한지붕 다섯세대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사진은 1952년 중앙동 일대 전경이다.


무일푼 가장으로서의 피난살이. 내가 피난지 부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애의 위기였는데, 아내가 생활력을 발휘했다. 원래 아내는 도쿄 유학 시절 가정학을 공부했고, 요리 솜씨도 좋았다. 그는 평양에서도 이름날 정도로 도넛을 잘 만들었다. 양명문 같은 시인은 우리 집에서 도넛 얻어먹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피난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아내는 드디어 도넛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장사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아내의 도넛을 갖고 골목 모퉁이 빵집으로 들고 가니 다행히 받아 주었다. 도넛이 잘 팔린다면서 주문량도 날로 늘었다. 하지만 도넛의 인기 소문 때문에 같이 살던 친척들부터 너도나도 도넛을 만드는 바람에 경쟁력이 무너졌다. 뭔가 새로운 ‘사업’을 해야 했다.

하루는 용두산 공원에 올라갔다. 생활을 위해 뭔가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정말 돈벌이는 남의 동네 이야기 같았다. 다만 ‘달러 있는 곳’이 돈 벌 수 있는 곳이란 생각만 들었다. 무조건 동쪽으로 걸어갔다. 황량한 해운대를 처량하게 걷고 있는데, 누가 ‘김 선생!’ 하고 불렀다. 안도산(안창호) 선생의 조카 안호상이었다. 내가 달러를 구하러 왔다니, 그는 문제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는 미군부대의 바에서 근무 중이어서 ‘달러의 길’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저녁나절이 되니 그는 미제 시계 서너 개를 갖고 나왔다. 나는 도넛 판 돈으로 시계를 샀다. 시계의 성능은 몰라도 좋은 디자인은 알 수 있었다. 시계를 갖고 도떼기시장으로 갔다. 마침 박고석이 자신의 손목시계 하나를 상자 위에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학진은 가위 들고 다니면서 이발사 노릇을 한다고 했다. 다들 어려운 피난살이였다. 사실 그림 그리는 화가들에게 어떻게 돈 버는 재주가 있겠는가. 다만 생존을 위해 뭔가 해야 하는 세월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나 역시 팔자에도 없는 시계장사를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나는 시계를 팔아 재미를 보았다. ‘달러’의 위력도 점차 알기 시작했다. 달러 시세를 도표로 그려가면서 연구했다. 달러 가격이 바닥에 있을 때 사 올라갈 때 팔면 그만큼 이익이 남았다. 대구에서 사서 부산에서 팔기도 했다. 당시 달러장수는 평안도 출신이 많아 대화도 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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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부산 피난생활을 시작한 김병기는 난생처음 장사 길에 나섰다. 도넛으로 번 돈으로 미제 시계를 구해 도떼기시장(국제시장)에서 팔기도 했고 미군 보급창에서 나온 통조림이나 폐잡지를 헐값에 받아다 넘겨 큰재미를 보기도 했다. 1952년 미 육군 종군기자 로저 마슈츠가 찍은 부산 부평동 깡통시장의 노점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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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달러를 구하러 포항에 갔다가 우연히 한흑구 시인을 만났다. 그는 미제 물건 장사를 한다고 했다. 미군부대에서 거간꾼이 리어카 가득 통조림 깡통 같은 것을 갖고 나오면, 그 물건을 사서 중개상 노릇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영어를 읽지 못하는 거간꾼들이 깡통에 구멍을 내어 맛보고 내용물을 확인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구멍 뚫린 깡통은 흠집 때문에 싸게 살 수 있었고, 또 그렇지 않은 것은 상표로 내용을 구별하여 물건을 구입했다. 미제 물건을 받아다 부산 시장에서 파니 큰돈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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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석은 1952년 부산 피가로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어 유화 20점을 전시하기도 했다. 피난 시절을 그린 <법일동 풍경>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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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1일 부산 중앙동 친척집 정착
한지붕 다섯세대 ‘무일푼’ 피난살이 시작

“윤중식 가족 거절…내내 말을 걸지 않아”

가정과 출신 아내 도넛 만들어 ‘첫 장사’
미제 고급시계 구해 도떼기시장 진출
“박고석도 시계 팔고 문학진은 이발사”
포항 한흑구 선생 덕분에 ‘깡통 장사’
미군 보급창 폐잡지 낙찰받는 행운도


서면 음식쓰레기 줍던 아이들·양공주들
“휴전뒤 ‘트래시 덤프’ 그려 국전 내기도”


1950년 황해도 신천서 양민 수만명 희생
피카소 ‘코리아에서의 학살’ 발표로 논란
“한국전쟁 너무 관념적 피상적으로 그려”
남포동 다방서 ‘피카소와의 결별’ 편지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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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는 부산 피난 시절 서면 미군 보급창의 쓰레기처리장 풍경을 그려 휴전 뒤 ‘트래시 덤프’란 제목으로 국전에 내기도 했다. 사진은 1950년대 초 미군들이 찍은 쓰레기장의 아이들 모습으로 최근 한국전참전용사디지털기념관재단에 기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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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속담처럼, 어려운 피난살이에도 살길은 열린 듯하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종군화가단 시절이었는데, 하루는 미군부대의 통역장교가 나를 불렀다. 그는 서울에서 장인(김동인)의 선거운동을 돕던 이여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의 제안은 미군보급창(CX)에 산적해 있는 잡지더미 폐지를 경매할 예정이니 참여하라는 거였다. 초량의 커다란 미군 창고에 가니 경매업자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종이 시세를 정말 몰랐고, 경매가 뭔지도 몰랐다. 다만 감각으로 낙찰 가격을 써냈을 따름이었다. 결국 멋모르고 정직하게 써낸 내 가격이 경매의 낙찰을 받게 했다. 나는 트럭 3대분의 폐지를 처분하여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전쟁통이기도 했지만 종이가 몹시 귀할 때여서 양질의 미국 잡지는 여러모로 인기 좋았다. 며칠 뒤 두 번째 경매를 한다 해서, 이번에는 지난번의 은혜를 갚으려고, 이익 없이 시장가격 그대로 써냈다. 그랬는데도 또 내가 낙찰받게 되었다. 일곱가량의 경쟁 상대들은 나에게 ‘이익도 붙이지 않고 어떻게 입찰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사실 이익을 남기지 않으려 했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커다란 이익을 남겨준 폐지 경매였다.

그때 서면에는 미군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다. 미군의 음식 폐기물은 또 돈과 통했다. 미군의 음식 쓰레기를 불하받으려고 ‘배고픈 피난민들’은 난리였다. 어른이고 아이고 가릴 것 없이 북새통 사이에 ‘양공주들’은 미인계로 한몫 잡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서면에서 노을 지는 풍경을 인상 깊게 보았다. 피난민의 처지에서 낙조의 의미는 색다르기도 했다. 훗날 서면 노을 풍경을 <트래시 덤프>라는 대작으로 표현했다. 쓰레기장의 풍경. 그 작품은 군복 입은 노동자들과 아이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줍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멀리 서산에는 황혼이 배경을 이루고 슬픈 여자(양공주)가 나오는 모습이다. 추상성이 강한 대작이다. 당시 우리의 ‘레알리테’(현실)는 쓰레기장이었다. 한국은 미국의 쓰레기장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그림은 1956~57년께 국전에 출품했다. 아쉽게도 도록도 발행하지 않고, 또 작품 반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어서 작품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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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코리아에서의 학살>을 그릴 때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마드리드 학살을 고발한 고야의 <1808년 5월3일>(1804년)과 같은 구도로 따랐다. 이 작품은 전쟁화의 전범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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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코리아에서의 학살>을 그릴 때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마드리드 학살을 고발한 고야의 <1808년 5월3일>(1804년)과 같은 구도로 따랐다. 이 작품은 전쟁화의 전범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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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이데올로기 쟁투는 결국 남한에 반공문화에 의한 ‘레드 콤플렉스’를 낳게 했다. 장욱진만 해도, 빨간색으로 소를 그렸다 하여 관계기관에 끌려갔었다는 일화가 있다. ‘빨갱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빨강은 금기색으로 굳어졌다. 당시 프랑스는 공산당이 다수당이었고, 피카소나 페르낭 레제 같은 화가도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문제는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하여 <코리아에서의 학살>이란 작품을 그렸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이미 <게르니카>라는 불후의 반전 주제의 작품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런 피카소가 고야의 <1808년 5월 3일> 같은 명화를 번안하여 <코리아에서의 학살>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1951년 살롱 드 메에 출품되었고, 그 사실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유족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프랑스 정부는 상속세 대신 작품을 받아 오늘날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을 건립했다. <코리아에서의 학살>은 피카소미술관의 복도에 오랫동안 진열되어 있었고, 나도 몇 차례 관람한 적이 있다. 아무튼 화백께서는 피카소의 그림과 관련하여 부산 피난지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 내용과 집필 배경을 설명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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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1952년 발로리스의 옛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2점의 패널화인 <전쟁>(아래)과 <평화>(위)도 그렸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때 독일 공군의 대규모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와 1951년 <코리아에서의 학살> 함께 피카소의 3대 평화 연작을 이룬다.


“파블로 피카소의 <코리아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은 1951년 부산에서 <타임> 잡지를 보고 알았다. 그림 내용은 무장한 기계화 부대가 벌거벗고 있는 양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기계화 부대는 미군을 의미하고, 그런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군이 자행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고 있던, 황해도 ‘신천의 양민학살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미군의 양민 학살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또 훗날 전문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미군 학살이라기보다 민간 좌우익 간의 살육전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피카소가 미국을 비판하는 태도와 작품 제작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우리를 위해 미군은 해방 때까지 4년을 일제와 싸운 반면, 소련은 휴전 일주일 전에 참전해,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반반씩 나눠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의 미국 비판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피카소를 단순히 비판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다. 당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다. 독일 나치 점령 시기에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이 제일 용감했다. 반나치 투쟁에 피카소가 감동받은 것 같다. 그래서 피카소는 나치가 날라다 준 석탄을 때지 않고 냉방에서 그림을 그렸을 정도였다. 그때 피카소는 해골을 많이 그렸다. 전쟁 때니까 해골은 하나의 현실이었다. 연인의 키스도 그렸는데, 그 키스는 전쟁통에 이별하는 키스였다. 피카소는 저항을 한 작가다. 피카소보다 먼저 나온 마티스는 생의 환희를 그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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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전후 60대 중반의 피카소는 40살 연하의 여섯번째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와의 스캔들로도 세계적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1948년 지중해변에서 절친인 종군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작품이다.


피카소는 1952년에도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을 로마에서 그렸다. 전쟁은 이렇고, 평화는 저렇다라는 것. 전쟁은 나쁘고 평화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피카소는 너무 관념이 앞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지옥과 천국으로 단순 비교하여 그린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너무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본 것 같아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전쟁이 만든 ‘굿바이 피카소!’였다. ‘피카소와의 결별’은 그런 배경에서 쓴 글이었다. 이 글은 1951년 부산 남포동의 어느 다방에서 시인과 화가들을 모아놓고 발표했다. 공초 오상순과 조각하는 차근호 등 20여명이 있었다. 하지만 편지를 피카소 본인에게 실제로 부칠 방법이 없었다. 원고의 전문은 1954년에야 한 잡지를 통해 활자화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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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김병기는 <타임> 잡지에서 <코리아에서의 학살> 관련 기사를 보고 부산 남포동 뒷골목의 한 다방에서 ‘굿바이 피카소’ 편지를 발표했다. 이날 자리는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과 교유했던 공초 오상순(사진)이 마련해 조각가 차근호 등 예술인 20여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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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굿바이 피카소’ 편지는 1954년 4월 <문학예술> 창간호에 뒤늦게 실렸다. 오영진·박남수·원응서 등 월남 예술인들 중심으로 만든 잡지다.


‘피카소 씨여! (…) 물론 당신의 비설명적인 표현은 지나친 내용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총을 겨누는 로봇 병사들의 한 그룹과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 그룹이 무엇을 또한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아마도 코뮤니스트의 공식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45년부터 몇 해를 두고 보아 왔으며, 특히 이번 동란의 격랑 속에서 지칠 대로 보아온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신의 <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학살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우리들의 정치적인 위치가 당신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김병기, ‘피카소와의 결별’, <문학예술>, 1954. 4.)

피카소가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박정희 이래 문민정부 시절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1969년 난데없이 정부는 ‘피카소’라는 이름의 사용을 반공법으로 금지시켰다. 그 결과로 어린이용 인기 크레파스였던 삼중화학공업의 ‘피카소’는 망해야 했다. 1990년대 세계적인 천재화가 명성과 함께 ‘피카소 전시회’가 들어왔지만 <코리아에서의 학살>은 걸리지 못한 적도 있다. 반공 국시 시대엔 이런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레드 콤플렉스’는 분단시대를 상징하는 열쇳말로 작용했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가운데 하나는 피카소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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