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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데스크에서] J노믹스와 韓銀의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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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방현철 경제부 차장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임기가 보장되는 자리를 하나 꼽는다면 한국은행(한은) 총재라고 할 것이다. 1998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꿔 한은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한 후 총재의 4년 임기는 지켜주는 게 불문율(不文律)이 됐다. 정치권 눈치 보지 말고 경제 상황만 고려해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라는 사회적 요구다. 그런데 부작용도 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한은 총재가 불가피하게 새 정부와 긴 동거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기간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과 한은 총재의 생각이 어긋나면 '불안한 동거'를 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이성태 총재는 이명박 대통령과 임기가 2년 겹쳤다. 이 총재는 '돈을 너무 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저금리, 고환율'을 선호하는 이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기 어려웠다. 이 총재는 고환율로 물가가 오르자 글로벌 금융위기 바로 직전인 2008년 8월 금리를 올리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9월 위기가 터지자 정부에 끌려가듯 금리를 파격적으로 내렸다. 4개월 만에 기준금리는 연 5.25%에서 연 2%가 됐다. 너무 내렸다 싶었는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 총재는 '장작론'을 꺼내 들었다. '영하 30도 혹한을 대비해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땠지만 알고 보니 영하 5도 정도여서 장작을 좀 빼야 한다'는 비유로 금리 인상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임기를 마쳤다.

후임 김중수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과 임기가 1년 겹쳤다. 이명박 정부 시절 진정한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을 자임했던 김 총재는 박근혜 정부 들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새 정부의 경기 부양 기조에 맞춰 금리를 인하할 것이란 기대가 많았는데도 금리를 묶었고, 금리 동결 신호를 줬다가 갑자기 금리를 내리기도 했다. '양치기 한은'이란 말까지 들었다.

조선일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0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열린 2017 한국은행 위탁고서 특별전 '규장각에서 만나는 한국은행의 서가' 개막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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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은 총재는 내년 3월 임기까지 문재인 정부와 동거해야 한다. 지금 이 총재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 6월부터 금리 인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미국이 금리 인상 기조여서 가만있으면 앞으로 한국보다 미국 기준금리가 높아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자금 유출을 막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어떤 금리 정책이 문재인 대통령의 J노믹스와 조화를 이룰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가계부채 급증을 잡자면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득 주도 성장' 기조에서 금리를 올려 서민 부담을 키우긴 부담스럽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헷갈릴 땐 우선 소통에 나서야 한다. 미국엔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들어섰다. 하지만 므누신 재무장관과 옐런 의장은 관례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를 함께 하며 의견을 나눈다. 한은 총재의 임기를 보장하기로 했다면, 정부와 한은은 정권 초의 '불안한 동거' 우려를 없앨 방안을 짜내야 한다.

[방현철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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