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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40년 모은 ‘근대 보물책’ 3만점 아낌없이 나누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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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정년퇴임하는 서지학자 오영식 교사

한겨레

보성고 퇴임을 앞두고 연 소장도서 전시회장에서 만난 서지학자 오영식 교사. 그의 보성고 사무실은 올해 문화부가 우수콘텐츠 잡지로 인증한 반연간지 <근대서지>의 산실이다. 내년 봄에 학회 사무실을 마련해 3만권 장서까지 보관할 계획이라고 했다.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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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성고 오영식(62) 교사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는 모범장서가상을 탄 게 만 33살 때인 1988년이었다. 그때 그는 3400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대 국문과 2학년 때부터 서울 갈현동 헌책방을 돌며 고서적을 모아온 열정이 평가를 받은 것이다. 지금은 장서가 3만권 정도 된다. 이달 보성고를 정년퇴임하는 오 교사는 최근 ‘제4회 화봉학술문화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퇴임을 앞두고 11~26일 서울 인사동 화봉책박물관 인사고전문화중심에서 소장도서 전시회 ‘40년-108번뇌’도 열고 있다. 그를 지난 14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장서가상을 받은 뒤 그는 <불암통신>이란 이름의 소식지를 만들어 소장 자료를 공개해왔다. 2005년까지 모두 12권을 펴냈다. 2009년에는 그가 주도해 근대서지학회를 만들었다. 학회에서 내는 반연간지 <근대서지>(소명출판) 편집장을 맡아 지금까지 모두 15권을 펴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전경수 근대서지학회장은 그를 두고 ‘저수지와 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이 땅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연구자라면 ‘고문서 수집가 오영식’이란 존재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 교수 역시 한국 인류학 100년사를 정리하면서 오 교사의 자료에 많이 기댔다. 해방 뒤 나온 잡지 창간사를 모아 책을 펴낸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도 “해방기나 50년대를 연구하는 이라면 오 선생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대학때부터 수집 33살때 모범장서가상
교단 36년 퇴임기념 소장도서 전시회
‘40년-108번뇌’ 책 지켜온 애환도 소개


재직해온 보성고에 ‘출신 문인 상설관’
근대서지학회 꾸리고 회지 편집장도
오늘 전시장 ‘화봉학술문화상’ 시상식

그가 모은 자료는 숱하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육사의 시가 한시를 포함해도 30편이 되지 않아요. 제가 시 3편을 더 찾아냈죠. 이 사실이 신문 1면에 실렸어요.” 근대 최초의 문학동인지로 알려진 <창조> 이전에 같은 성격의 동인지 <신청년>이 있었다는 것도 그의 자료를 통해 확인됐다. 그가 2009년 펴낸 <해방기 간행도서 총목록 1945-1950>(소명출판)은 한국출판학회 저술·연구상을 받았다. 이 책이 정리하고 있는 5200여종의 출판물 가운데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얼추 50% 정도 된다고 했다. 해방기 간행물 목록을 크게 늘린 이 저술을 두고 이 시기 출판사 연구의 길을 텄다는 평가가 나왔다.

260여점의 전시 고서 가운데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그는 최초의 여성 등단작가인 김명순(1886~1951)의 두번째 시집 <애인의 선물>을 꼽았다. 그가 발굴해 책의 존재 사실이 알려졌다. “김명순의 첫 시집 <생명의 과실>은 군대를 가기 전인 78년에 8천원을 주고 샀어요. <애인의 선물>은 류보일 보성고 교장이 어느날 저를 불러 ‘이런 게 있어, 오 선생’ 하며 그냥 주셨지요.” 시인 임화의 도장이 찍힌 <신문예2>(1924)도 특히 아끼는 책이다.

그를 문학의 세계로 이끈 이는 만해였다. “서울 한성고를 다닐 때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에 빠졌어요. 한용운에 대한 논문을 써볼까 하고 국문과를 갔죠.” 중앙대 입학 뒤엔 민속학의 권위자인 고 임동권 교수가 지도하는 ‘민속학 연구반’에 들어갔다. “국문과를 가니 고전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도서관엔 자료가 부족했죠.” 그 시절 그가 살던 구파발과 멀지 않은 갈현동에 헌책방이 많았다. ‘고문서 수집 40년’의 시작이었다.

교직 6년째이던 87년 그는 판소리 <춘향가> 연구로 석사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고교에 야간부가 있었죠. 밤에 가르치고 낮에 공부를 했죠. 박사는 경제적인 문제로 포기했어요. 교사직과 병행하기도 어려웠어요.”

학자의 길을 걷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교수란 친구들 보면 너무 직업인이 돼 있어요. 논문을 봐도 규격화되어 있어요. 그래서 <근대서지>도 등재지 신청을 안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보지 않는 글만 실리거든요.”

아내 몰래 고서를 많이 샀고, 교사 수입의 15% 정도는 책 수집에 썼단다. 왜 힘들게 모은 ‘보물’을 아낌없이 연구자들에게 내주는 걸까? “아끼면 똥이 됩니다. 하하. 국문과 공부를 하면서 1차 자료 부족을 절감했죠.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일본에서 찾았다고 하잖아요.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죠. 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자료가 너무 많이 사라졌어요.” 폐휴지 모으기 운동, 70년대 이민 붐, 대학 도서관이 기증 도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점 등도 자료의 멸실을 부추겼다고 했다.

보성고는 염상섭·이상·임화·현진건·김기림·조정래·조세희와 같은 한국 문단의 거목을 배출한 학교다. 그가 모은 자료로 2003년 학교 안에 보성고 출신 문인 상설 전시관을 열었다. 그가 책임편집을 맡은 <보성과 한국문학>이란 책도 곧 나온다. 40명의 필자가 보성고 출신 문인 40명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82년 서울 재현고 교사로 강단에 선 뒤 3년 만에 보성고로 옮겼다.

‘서지학자 선생님’의 국어 수업이 궁금했다. 윤동주나 정지용 시집의 원본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지만 자료를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단다. “수업 땐 열심히 이비에스(교육방송) 교재를 풀어줄 수밖에요. 우린 정부 주도로 교육의 다양성을 훼손시키는 나라가 되어버렸죠. 빨리 이비에스에서 벗어나야죠.”

그의 장서는 해방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 “어떤 학자가 일제 때 연구를 많이 했으나 월북 뒤 숙청당해 사라졌어요. 그런데 다른 교수가 그의 연구 업적을 자기 것이라고 속였어요.” 그는 이 시대의 ‘학문 정체성’이 한마디로 개판이라고 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역사를 복원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상허 이태준과 근원 김용준이다.

“전시 오프닝 때 책을 지키는 마음을 강조했어요. 16일 화봉상 시상식 때는 책을 나누는 마음을 강조할 생각입니다. 책이나 정보나 자료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그는 퇴직 뒤 계획을 물었더니 “별것 없다”며 “작업 중인 <해방기 잡지기사 색인집> 출판에 더 힘을 쏟겠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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