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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박진호의시사전망대] 日 왜곡에 폄하된 위대한 대한제국 '5년의 韓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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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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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S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박진호의 시사 전망대 (FM 103.5 MHz 6:20-8:00)
■ 진행 : SBS 박진호 기자
■ 방송일시 : 2017년 8월 15일(화)
■ 대담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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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3만 명 넘는 현대식 군대 가진 군사 대국
-OECD 통계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이르러
-경술국치 당시 고종?명성황후?대원군 욕하는 식민사관 프레임에 갇힌 책들 쏟아져
-日 궁궐 점령 후 고종 생포,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친일파 정부 세워
-갑오경장은 사이비 개혁 '갑오왜란' 감추는 교신 증거 상당해
-고종에게 밀지 받은 전봉준 2차 봉기 앞두고 육필로 누설말라 당부
-서재필 독립신문 자기 돈으로 만들었다 거짓말, 100% 고종의 내탕금
-친일파 박영효 끄나풀들, 친일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

▷ 박진호/사회자:

우리 국민들에게 고종 시기의 대한제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무력했던 시대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대한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치욕의 역사로 기록된 그 시기가 바로 위대한 시기였다. 이렇게 고종의 대한제국을 새롭게 써가는 학자 분이 있습니다. 오늘 시사 전망대는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를 연결해서 자세한 얘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황태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예. 안녕하십니까. 황태연입니다.

▷ 박진호/사회자:

네. 이른 아침에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올해 초에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이라는 책에 이어서 이번에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내용을 보면 가장 주목되는 것이, 먼저 대한제국은 군사강국에 경제대국이었다는 분석을 하신 건데요. 어떤 근거를 저희가 들 수 있겠습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군사강국이었다는 대목은 일단 신식 군대가 3만 명을 넘었고, 장교와 사병을 다 합쳐서요. 이런 군대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아무 나라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과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러시아군에 의해서 괴멸된 상태여서 한국군이 두 번째 강한 현대식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제대국이었다는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당시에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815달러로 OECD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지 않아서 그렇죠. 문제는 5년 뒤에 대한제국의 경제 발전 여세로 그 시점을 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048달러에 이릅니다. 1,048달러는 우리를 앞질렀던 이전 시대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를 제치고 일본과 거의, 일본은 1,430달러였는데요.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망한 거죠. 일본의 군사 강점에 의해서요.

▷ 박진호/사회자:

그러면 당시의 OECD 관련 기록이 아직 남아있다는 말씀이시네요?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거의 2,000년간의 경제 통계들이 나와서 시중에서도 팔리고 있습니다.

▷ 박진호/사회자:

그렇군요. 되게 신선한 부분인데.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다면 왜 대한제국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가혹하게 평가를 하고 있을까, 그런 평가가 남아 있을까. 또 왜 일본에 그렇게 무력하게 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두 질문은 실은 본질적으로 다른 질문인데요. 하나씩 말씀드리면. 우선 한일합방이 된 해에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에 관한 4권의 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모조리 고종과 민비, 대원군 욕하는 책들이고요. 또 조선과 한국이 얼마나 형편없는 나라인가를 말하는 책들이에요. 그 이후에 식민지 교육은 그 역사 프레임에 의해서 계속 가르쳐지게 된 것이죠.

▷ 박진호/사회자:

그러면 일본의 좀 의도적인 왜곡성 저서들이 많이 나왔습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예. 폄하가 계속되었던 겁니다. 일본에 그렇게 당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나라도 일본에 당했고, 러시아도 일본에 졌고, 미국도 사실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요. 그만큼 일본은 군사적으로 강했었습니다. 사실 일본과 그 정도 5년간 무력 투쟁을 항전할 만큼 싸워본 나라는 사실 미군 다음에는 한국군 밖에 없습니다. 대한제국 이후에 5년간, 1906년부터 1910년까지 거의 처절한 전쟁이 벌어지죠. 그런데 그 전투의 각개전투에서는 한국군이 늘 우세했다고 기록이 돼있습니다. 일본군에 비해서요. 다만 실탄과 총이, 포가 떨어지면서 만주로 자꾸 올라가야 했죠.

▷ 박진호/사회자:

5년간의 처절한 전쟁을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부분을 저희가 잘 후대에서 인식을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황태연 교수님 저서를 보면 갑오왜란, 갑진왜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내용을 보면 1894년에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싸움은 이 당시를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신 건데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갑오경장이 아니라 갑오왜란으로 보고 계신 이유는 어떤 겁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우선 일본군은 동학난과 무관하게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서 군대를 기르고 있었고, 이미 5월 달에 동원령이 떨어집니다. 청나라 군대가 한국에 상륙도 안 됐는데. 한국에. 무조건 상륙하려고, 침략하려고 했었던 것이고요. 6월 8일 날 인천에 미리 군대를 수백 명을 데려오고 들어옵니다. 첫 번째 군대인데요. 들어와서 7월 23일 날 궁궐을 점령해요. 왕을 생포해서 포로로 잡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작전계획에도 왕을 포로로 잡는 계획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거의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친일파들을 가지고 정부를 세우죠. 그게 소위 갑오경장 정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지방에서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어나는 동학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서 지방으로 일본군들이 내려가는데요. 그 전투에 대한 모든 지시가 일본에 있는 일본 대본영으로부터 떨어집니다. 만약 진압이라는 말을 썼다면 우리 조선 군대가 해야 하고 조선 군대를 도와서 해야 하는데. 동학농민군과의 전투 작전의 모든 명령이 일본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대본영에서요. 전쟁인 거죠.

▷ 박진호/사회자: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동학농민군이 맞서 싸우는 양상이었다는 설명이신 것 같은데. 이게 특히 관심이 가는 게 이 당시의 일본군과 우리 농민군의 전쟁 과정에서 고종의 역할인데. 앞서도 조금 말씀하셨지만 고종이 동학을 탄압한 게 아니고 일본에 맞선 조선왕실과 동학군의 연합 항전이 벌어졌다는 분석인데요. 이 부분이 주목이 되는 부분인데요.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예. 지금 학자들, 일본 학자들도 그렇고 우리나라 학자들도 그렇고. 앞서 말씀드린 갑오경장이 아니라 갑오왜란이라고 굳이 많이 써왔었어요. 다만 이것을 제가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있는 것을 제가 공개하는 것이고요. 대중들은 처음 듣는 것이죠. 갑오경장이 아니라 갑오왜란이었다는 얘기는. 그 다음에 이게 연합항전이었다는 것은 사실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그 때 군대는 우리 농민군밖에 없었습니다. 동학농민군. 그래서 고종이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서 밀지를 전합니다. 전봉준에게. 2차 봉기를 하라고. 2차 봉기는 완전히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봉기하는 것이거든요. 2차 밀지 내용이 남아있고. 일본군이 그것을 빼앗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밀지가 발견되거나 누설되면 왕의 지위가, 포로로 잡혀있는 왕의 위치가 어려워지니까 옥체에 관계되는 일임으로 누설하지 말도록 특별히 당부하는 전봉준의 육필 글씨가 있어요. 그것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2차 봉기는 순수하게 고종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난 거죠. 이전에는 이 밀지를 못 찾았기 때문에 동학농민군과 고종은 한 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탄압만 했다고 일본군이 써놨으니까 그대로 외우는 거죠.

▷ 박진호/사회자:

그 부분이 되게 주목되는 부분이네요. 사실 갑오경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일종의 근대화의 시발점이나 개혁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러면 교수님 말씀은 갑오경장이라는 것도 일종의 일본이 만들어낸 식민지 프레임의 함정이다. 이렇게 보시는 건가요?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예. 그런데 내부 기록을 보면 갑오경장은 하나도 할 생각이 없고, 갑오왜란을 감추는 역할을 하도록 그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교신들이 많습니다. 아무 의도가 없는 거죠. 여기에는 진실한 뜻이. 그리고 그 때 이루어진 모든 조치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요. 대부분이 반개혁이었고 한국군을 해체하는 계획이거나 또는 식민지 강제 침투를 하기 위해서 일본군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내거는 것이었고. 젊은 과부를 시집보내는 문제도 바로 무효화 시킵니다. 두 달 뒤에 절대로 청상과부를 시집보내면 안 된다는 뜻의 공문들을 자꾸 내려보내고. 고종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반개혁 아니면 사이비 개혁이 이 갑오경장이라고 하는 것의 개혁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개혁했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갑오경장 내용을 분석해보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박진호/사회자:

이게 주목할 만한 분석인데요. 그런데 저서 내용을 보면 이 점이 학계나 일반적 시각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될 것 같은데.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독립협회를 주도했던 개화 세력을 사실상 친일 세력으로 평가를 하고 계신 부분인데요. 이 부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것은 이미 다른 한영우 교수의 통사에도 독립협회는 옛날처럼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고 친일적인 이미지로 다시 쓰고 있는데요. 문제는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이런 것은 전부. 독립신문은 100% 고종의 정부 내탕금으로 만들어졌고 서재필은 자기 돈으로 만들었다고 거짓말 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그것을 믿고 있어요. 독립협회의 이름도 고종이 내린 것이고, 독립문 건설 자금도 내탕금으로 17%가 되어있고 국민 모금을 통해서 하라는 명령도 고종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독립이라는 말 자체도 고종이 들어갔고. 이 독립협회가 중간에 1898년 7월 이후부터 친일-반러시아 성향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친일파들이 많이 여기에 들어와서 암약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배후에 조종한 사람은 일본에 도망가 있던 박영효였어요. 박영효의 끄나풀들이 일본인 거주 지역에 들어와서 거기서 조절하고, 나중에 만민공동회를 만들어내고. 만민공동회는 완전히 친일파가 주도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8개월 동안 변란 세력으로 활동하고 변하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앞부분, 고종이 만들었던 부분도 역사책은 잘못돼있고 서재필이나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잘못돼있고. 변질된 사실도 역사책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 박진호/사회자:

네. 아쉬운 시간이 다 갔는데요. 오늘 자세한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예.

▷ 박진호/사회자:

지금까지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와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한국의 근대사, 우리가 다시 조명해볼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생각이 드는 인터뷰였습니다. 광복절 박진호의 시사 전망대 오늘 순서는 여기까지고요. 저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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