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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기자칼럼]빚의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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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어떻게 하다가 달리기 시작했는지 자기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여왕과 손을 잡고 달렸는데 여왕이 너무 빨리 달려 따라가느라 힘들었다는 것뿐이었다. 여왕은 “빨리, 더 빨리”라고 외쳤지만 앨리스는 그 이상은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무와 주변의 다른 것들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앨리스는 점점 숨이 차서 다시는 말을 못할 것만 같았다. 여왕은 “지금이야 빨리 더 빨리”를 외쳤다. 앨리스는 숨이 막히고 어지러워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경향신문

지난 주말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이마를 탁 쳤다. 과열된 우리 부동산 시장과 너무 닮아서다.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집값은 저만치 가 있다. 다시 열심히 모았지만 집값은 또 한참 달아났다.

돌아서면 집값이 뛰었다. 두어 달 전 1억8000만원 아파트가 지난주 2억4000만원이었는데, 이번주는 2억8000만원이라고 했다. 몇 번 망설이는 사이 집값은 3억원을 넘어섰다. 부랴부랴 부동산 중개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매물이 없다”고 했다. 요즘 얘기가 아니다. 12년 전인 2005년 얘기다.

올해 서울 집값 파동은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노무현 정부 때 집값이 올랐다는 각인효과는 선명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부동산에 대한 기대가 상승했다. 문재인 정부의 주요 구성원은 그때 그 사람들이다. 당시 그들은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강남사람들이 외쳤던 구호가 “이대로”였다.

문재인 정부가 취임 100일도 안돼 두번째 부동산 대책을 낸 것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각오도 남달랐을 것이다.

8·2 대책이 꽤 강력했던 모양이다. 서민들의 불만이 많다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중 압권은 “(빚내서) 집을 사려고 했지만 살 수 없게 됐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이전에는 6억원짜리 집을 사는 데 내돈 1억8000만원(30%)만 있으면 됐지만 이제는 3억원(50%)이 필요하니 ‘언제 3억원을 모으겠느냐’는 식이다. 이는 “서민들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대출이 갚을 필요가 없는 돈이라면 이 주장은 맞다. 하지만 대출은 빚이다. 서민들에게는 빚 3억원도 크다. 3억원이면 매달 갚아야 하는 원리금만 대략 150만원이다. 하물며 4억2000만원은 쉽게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빚을 주렁주렁 달고 어떻게 중산층이 된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내집이 하나뿐인 실수요자에게 빚은 영원히 빚일 뿐이다. 더 좋은 집으로 옮겨가려면 또 빚을 내야 한다. 내집도 오르지만 남집도 오른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거울나라의 앨리스처럼 말이다.

정부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축소가 적절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득 증가를 웃도는 과도한 집값 상승을 따라가자면 대출을 해서 메울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빚을 내 더 비싼 집을 사는 경쟁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금리를 올리는 묘수도 있지만 경기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많아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관 빼고는 은행 것’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새집을 샀지만 너무 많은 대출을 일으켜 실제 자기 지분은 얼마 안된다는 자조감 섞인 표현이다. 어느 날 집들이가 사라진 것도 내집 마련이 마냥 축복만이 아닌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2002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서민들도 누구나 내집을 마련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빚의 경제를 찬양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리 금융기법이 발달했다고 해도 빚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교훈이다. 우리가 벌써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경제부 |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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