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3 (월)

[조용헌 살롱] [1104] 三栢堂 밤나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과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더위에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산골의 길을 돌고 돌아서 온계종택(溫溪宗宅)에 도착했다. 종택 입구의 오래된 고목이 나그네를 맞아준다. 수령 500년 된 밤나무다. 나무 둘레가 5.5m나 된다.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 맞잡아야 하는 거목이다. 오래된 나무를 보는 게 취미인 필자도 500년 된 밤나무는 처음 본다.

밤나무는 유가(儒家)에서 특별히 중시하는 나무이다. 제사상에도 조율이시(棗栗梨枾)가 올라가지만, 밤나무(栗)는 뿌리 밑에 처음 밤나무를 심었을 때 심은 씨, 즉 밤이 남아 있다. 밤나무를 파 보면 신기하게도 처음 심었던 씨가 안 썩고 뿌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 장면을 보고 그 출발과 근원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인 것이다. '고목에 꽃이 피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였던가. 500년 된 이 집안의 밤나무에도 매년 밤이 열린다. 매년 300~500개의 밤알이 수확되는데, 단단해서 벌레가 먹지 않는 토종이다.

조선일보

정직과 충성으로 일관해온 온계가의 역사를 간직한 채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온계종택 밤나무. /출처=월간 산


온계종택의 당호는 삼백당(三栢堂)이다. 온계 이해(李瀣·1496~1550)는 퇴계의 중형이다. 시냇물(溪)을 따라서 형제간에 집을 지었다. 이 집안이 잘 내려오다가 환난을 만났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종손의 동생인 지암(芝庵) 이인화(李仁和·1858~1929)가 의병대장을 했다. 명문가 후손들이 의병대장을 맡는 게 당연했다. 이 삼백당이 의병 활동의 거점 역할을 했고, 그 보복으로 1896년에 일본군이 삼백당을 불태워 전소됐다.

안동 일대에서 신망받던 명문가의 종택이 불타버리자 그 후손들은 갈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너 군데의 지손(支孫)들 집을 전전하면서 살아야만 하였다. 100년 넘는 떠돌이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2011년에 국가보훈처에서 지원해 삼백당을 복원했다.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탄 지 115년 만의 복원이었으니 고목에 꽃이 핀 경우가 아닌가! 땀에 젖은 몸으로 사랑채 뒷마루 문을 열고 마룻바닥에 앉아보니 끈적거리던 습기가 증발한다. 현 17대 종손인 이목(李睦·69)에게 삼백(三栢)의 뜻을 물어보니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게 조상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선비 정신이 다 끊어진 게 아니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과]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