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4 (화)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끝나지 않는 노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노래

이 노래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이 없는 노랩니까
그런 줄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거야
제가 신청한 게 아니라구요
그랬던가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해할 수 없군
근데 왜 저만 듣고 앉아 있습니까
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구요
꼭 듣고 싶은 다른 노래도 있습니다
기다리면 들을 수나 있습니까
여기서 꼭 듣고 싶은데, 들어야 하는데
딴 데는 가지 못합니다
세월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노래 좀 그치게 해, 이씨

―이희중(1960~ )('참 오래 쓴 가위', 문학동네, 2002)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좋을수록 끝이 선명해야 한다. 한데 끝이란 그 이상을 인지할 수 없을 때 가능할 텐데 정말 끝은 있기나 한 걸까? 실은 끝을 알 수 없기에 일정한 기준으로 단락과 공백을 정해놓곤 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 좋고 잠이 좋고 그믐이 좋고 세모가 좋고 헤어짐이 좋고 마침이 좋다. 이런 끝은 0의 발견과도 같다. 십진법에 따르면 0은 끝이자 시작이다. 더하거나 뺄 때는 그대로지만, 곱하거나 나누면 0이나 ∞가 된다. 0처럼 끝은 결말이고 중지이고 모서리다. 공(空)이고 멸(滅)이니, 색(色)이고 생(生)이겠다. 듣고 싶은 노래를 꼭-지금-여기서 듣고 싶은데 신청하지 않은 노래를 끝없이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 지금-여기-이대로-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도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다행한 일이고, 그리고 끝이 있어 다행한 일이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