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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최현숙의 말 쓰기] 사적이고 정치적인 늙어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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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사진 박김형준 사진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할배의 탄생> 저자


다른 죽음들 말고, 늙어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여든 근처 노인들을 위한 돌봄 노동 현장에서 죽음은 흔한 이야깃거리다. “죽어야 되는데”, “다 죽는데 머가 무서워?”, “치매랑 중풍이 겁나지, 죽는 거는 하나도 안 겁나”, “딱 3일만 아프고 죽으면 젤로 큰 복이지”, “제발 좀 부탁이니 살리지 좀 말라 그래.”

김 할머니의 새벽기도는 늘 “하느님, 왜 지난밤에도 나를 안 데려가셨나요?”란다. 세 종류의 암을 거쳤던 옥탑방 독거노인 이 할아버지는 “이병철 죽는 거도 봤고, 이건희도 죽었대나 어쨌대나 하는데, 나 죽는 게 머가 억울해?” 하며 웃더니, 세 번째 암 수술도 공짜로 받고 곧 죽었다. 위암 말기 33㎏의 황 할머니는 “어떡해야 죽냐?”가 입에 붙어 있고, 그 “어떡해야”에 답이라도 하듯 김 할아버지는 간단하게 죽음을 집어먹었다. “별일 없어”, “걱정해봐야 소용없어”, “보이고 싶지 않아”, “너희끼리 잘 살고 우린 내버려둬”. 프랑스 상위계층 늙은 부부의 죽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아무르>(미하엘 하네케 감독)에서, 먼저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는 남편이 자식들과의 통화나 대화에서 하는 말이다. 소외든 외로움이든 이왕 닥친 김에, 그 속에서 자유와 자존을 발라낸다.

사적 관계만 넘어서면 늙어죽음은 감사하고 필수적인 일이다. 죽음 근처의 갖은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두 죽는다는 면에서 공평하기까지 하다. 죽음에 바짝 다가간 노인들은 말이 없다. 산 자들만 쑥덕대는 죽음에 관한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무섭다느니 외롭다느니 슬프다느니 모두 산 자들의 느낌이다. 늙어죽음은 거듭되는 소멸과 해체, 노쇠와 병증들과 통증들과 느려짐과 불가능해짐에 이어 오는 것이어서, 마침내 죽음에 닿음을 마음으로 치하하게 된다. 하물며 심히 고통스러운 생애였다면 더더욱, 죽음은 보는 이에게도 위안이자 희망이다. 젊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까지 여럿 듣는 요즈음, 잠자리에 눕고 일어서며 ‘안 깨어날 수 있다’와 ‘깨어났구나’를 자주 떠올린다. 멀지 않은 장차에 죽음을 떠올려놓고 사느라, 욕망과 일상은 점점 단출해진다.

한편, 죽기 직전까지는 인구(人口)다. 먹고 말할 입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여서, 정치다. 가족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고독사는 다반사다. 고령화로 인한 배우자의 죽음, 중년의 이혼, 청년의 결혼 안함 등으로 1인 가구는 급증하고 있다. 변두리에서 중심까지, 가족주의는 성큼성큼 허물어지고 있다. 복지를 여전히 가족에게 떠넘기는 한, 빈곤 가구한테 가족은 갈수록 덫이다.

지난 8월2일치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불평등 모순: 장수, 좋은 건강 그리고 빈곤’ 제목의 기사에서, 기대수명도 세계 최고이면서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도 최고 수준인 “특이하고 명백한 모순”의 한국을 다루고 있다. 복지 없는 장수는 이미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재앙이다. 8월9일 발표한 ‘문재인 케어’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이 빈곤 노인들의 생애 마지막 궁지를 더 깊게 하지 않을지 염려된다. 원인에 대한 대책은 없이 일단 자살과 고독사는 막으라는 독거노인 복지 현장의 최우선 업무지시 ‘안전 확인’은, 산 자들의 낯이나 세우자는 거다.

8월2일치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초고령 사회 일본에서 빈곤 노인들의 해부용 시신 기증이 포화 상태라고 보도했다. 한국의 많은 빈곤 독거노인들 역시 ‘대학병원 시신 기증’을 서로 이익인 시신 처리로 여긴다. 모두가 죽는다는 것만 공평하지, 인구(人口) 너머까지도 계급 차별은 이어지고 있다. 오로지 사적인 죽음은, 이후까지도 여전히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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