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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류병학의 사진학교] 37. 방아쇠를 당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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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중부매일

Roland Barthes Credit Michel Salzedo
벤야민과 말로는 복제기술을 기존 예술작품을 복제하는 것으로만 국한하여 논의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이 복제하는 예술작품이 회화나 조각이 아닌 사진작품이라면? 말로는 회화나 조각을 찍은 사진을 인쇄한 사진도록을 '상상의 박물관'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사진작품을 인쇄한 사진도록은 '상상의 박물관'인가 아니면 '실재의 박물관'인가?

필자는 이 점을 언급하기위해 우회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 우회의 길에는 해외 사진이 아닌 국내 사진작가들의 사진들을 모델로 삼아 읽어보도록 하겠다. 부제는 '방아쇠를 당겨라!'이다. 여기서 말하는 '방아쇠'는 사진기의 '셔터'를 뜻한다. 사진가는 어떤 '풍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물론 그 '풍경'은 단지 산이나 소나무밭 등 자연적 풍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풍경도 내포한다. 모든 풍경은 바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풍경을 향해 사진가는 방아쇠를 당긴다(셔터를 누른다). 따라서 사진가의 시야로부터 사라져(지나)가는 풍경은 죽는다. 아니다. 그 풍경은 부활한다. 모순되게도 지나가는 풍경은 죽음으로써 가능케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자신의 이미지를 죽음에 맡기는 것이 풍경의 살아가기(living on)란 말인가?

사진은 그 지나가는 풍경을 죽임과 동시에 살린다. 그러면 그 사진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체가 아닌가? 그것은 지나간 혹은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거가 아닌가? 돌아가신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어머니는 사진의 세계에서 살아계신다(물론 이제 우리에게 바르트도 사진 속에서만 살아있다). 사진은 산자를 죽임과 동시에 죽은자를 살린다. 아직 죽지 않은 산자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자도 사진을 통해 살아있는 시체로 출현한다. 마치 유령(das spectrum)처럼. 유령? '살아있는 시체'말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진은 스펙트럼(spectrum)을 통해 인화된다. 그건 유령(spectre)으로 나타난다(spectre의 어원은 라틴어 spectrum). 바르트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1980)에서 사진의 스펙트럼(spectre, spectrum)을 구경거리(spectacle)와 구경꾼(spectateur, spectator)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읽었다.

"구경꾼은 신문, 책, 앨범, 고문서의 사진들을 꿰뚫어 보는 우리들 모두이다. 그리고 사진찍히는 어떤 것은 과녁, 참조물, 일종의 작은 우상, 대상으로부터 격리된 환영(幻影)이며, 나는 그것을 사진의 유령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자신의 어근을 통해 구경거리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고, 거기에 어떤 무시무시한 뜻이 덧붙여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모든 사진에 다같이 존재하는 사자(死者)의 회귀이다."

따라서 사진의 스펙트럼(spectrum)은 사진의 유령(spectre)과 이중 놀이를 한다(spectre는 유령의 뜻 이외에도 망령, 도깨비, 귀신 혹은 그림자 등의 뜻으로도 열려져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바르트의 읽기를 확장했다. 그는 형용사 유령같은/스펙트럼의(spectral)를 명사화했다. 그리고 그걸 '사진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유령의 뜻으로 사용되곤 하는 revenant라는 단어도 삽입시켰고. 그건 바르트가 말했던 이름뿐인 나라(명부, 저승)부터 회귀된 시체이다. 데리다는 '시선의 권리(Droit de regards)'(1985)에서 그 회귀된 시체를 나타남(revelation)과 놀이했다.

"여기서 매체라는 단어는 나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것인데, 아울러 각각의 사진들은 유령, 환영(幻影) 그리고 시체를 기억케 한다. 여기서 모든 것은 흑과 백에서 시체의 회귀로 기술되고, 그것을 우리는 첫 드러냄으로부터 다음의 것으로 확인한다. 유령같은 것은 사진의 본질이다."

드러냄(revelation)은 데리다에게 호감을 주는(revenant) 것이기도 하다. 그 호감을 주는 것은 오래간만에 다시 나타난 사람(revenant)이기도 하면서 유령(revenant)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진은 시체로서 살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시체는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살아있는 시체이다. 자, 이제 '살아있는 시체'를 만나보자.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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