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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벌교 보성여관과 ‘태백산맥’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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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보성여관(1935년 건축, 2012년 복원).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3권에 나오는 표현이다. 소설 속에서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남도여관. 1948년 당시 실제 이름은 보성여관이었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가면 그 한복판에 지금도 이 여관이 있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것은 1935년. 벌교가 한창 번창하던 때였다. 일제강점기, 벌교는 교통의 요지였다. 선착장은 배들로 가득했고 일본인의 왕래도 잦았다. 벌교 읍내는 먹을거리도 많았고 상업이 번창했다. 읍 단위인데도 이례적으로 주재소가 아니라 경찰서가 있었다. 늘 돈이 돌았고,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렇다 보니 주먹패도 생겨났다.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보성여관은 벌교역과 함께 그 중심지였다. 여관엔 사람들이 몰렸다. 광복 후에도 보성여관으로 운영되었으나 1988년 여관 영업을 중단하고 가게 점포로 사용했다. 1989년 소설 ‘태백산맥’이 완간되고 이후 이곳을 복원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2008년 문화재청이 여관을 매입했고 보수 복원을 거쳐 2012년부터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 운영하고 있다. 갤러리, 공연장, 체험공간, 카페, 숙박시설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2층짜리 일본식 건물인 보성여관은 근대기 여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건물 외벽은 목제 비늘판으로,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마감했다. 쌍여닫이문으로 된 여관 주 출입문, 다양한 모양의 유리창, 큼직한 굴뚝 등이 멋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벌교엔 보성여관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도 ‘태백산맥’의 흔적이 즐비하다. 소설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현부자네 집(1939년 건축), 애틋하고 예쁘장한 소화 무당의 집(2008년 복원), 포구를 가로지르는 무지개 모양의 횡갯다리(홍교·18세기 건축),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소화다리(부용교·1931년 건축), 벌교 철교(1930년 건축), 옛 벌교 금융조합(1919년 건축)…. 모두 분단과 이념 갈등의 상흔이다.

지금의 벌교는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읍 단위 다른 지역에 비하면 분주한 편이다. 여전히 생동감이 넘친다. 그래서일까. 벌교에 가면, 보성여관에 가면 여전히 돈 자랑, 주먹 자랑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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