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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WEEKLY BIZ] 인간의 선한 열망 건드리자 160만명이 지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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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동아프리카를 찾은 제시카 재클리(Jackley·39)는 석 달 반 동안 빈곤에 허덕이는 농부와 어부, 숯 판매상, 양치기, 직공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는 움막 옆의 흙을 파서 벽돌 사업을 시작한 우간다 청년 패트릭도 있었다. 패트릭은 맨손과 물, 나뭇가지로 빚은 벽돌을 팔아 벽돌을 찍는 틀을 샀고, 이 때문에 품질이 좋아진 벽돌을 팔아 번 돈으로 벽돌 굽는 가마를 만들었다. 가마로 구운 벽돌은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맨손으로 혼자 시작한 패트릭의 벽돌 사업은 동생과 이웃 사람들을 고용할 만큼 성장했다.

재클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들은 현명하고 근면한 기업가였다. 기부나 기증을 요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대출을 원했다. 자신들의 능력만큼 일하고 싶어 했고, 자율권과 소유권을 느끼려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패트릭처럼 가슴 뛰는 기업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대출 확보의 핵심이라고 믿게 됐다. 내 친구들과 가족이 이런 참신한 기업가들의 이야기에 동참할 방법을 만들고 싶었다."



다음 해인 2005년 재클리는 당시 남편이던 맷 플래너리와 함께 '키바(KIVA)'라는 소액 대출 플랫폼을 세웠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는 선진국 사람들과 저소득층 대출 희망자를 P2P(Peer to Peer·개인 대 개인) 방식으로 연결해 주는 사회적 기업이다. 기부자 1인당 25~500달러 기부를 받아 대출자에게 1인당 최대 1만달러까지 빌려준다. 아프리카 사람 7명에게 3500달러를 대출해주며 시작한 키바는 올해로 창업 12년째를 맞았다. 누적 대출액은 84국 10억달러(약 1조1240억원)를 돌파했다. 은행 대출을 받기 어려운 빈곤층 대상 대출이지만, 자금 상환율은 97%에 이른다. 최근 스타트업 육성 업체 스파크랩이 주최한 데모데이 행사의 연사로 한국을 찾은 재클리를 만났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 기업의 성공 비결은 뭘까. 네 가지로 정리했다.

1. 기부자의 기부 열정을 자극

"사회적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명을 실현해 세상을 바꿔 나가는 기업이다. 어쩔 수 없이 기부를 요청해야 할 일이 생긴다. 키바 역시 돈을 버는 구조가 아니라 자금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플랫폼이고, 운영비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충당한다. 이런 사회적 기업가가 투자자나 기부자를 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당당한 태도다. 나 역시 어려운 사람을 위한 사업에 기부할 때마다 '이 어린이들의 목숨이 당신 손에 달려 있다' '당신이 아니면 이 사업은 할 수가 없다'는 식의 후원 요청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런 식의 대책 없는 압박은 상대에게 거부감만 일으키기 일쑤다.

가장 좋은 것은 내 열정을 보여주며 상대방의 마음속 열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내가 이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되, '당신이 동참하든 하지 않든 나는 이 일을 끝까지 해 나갈 것'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자발적 참여를 끌어낼 수 있다. 키바는 25달러 대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2.5달러 정도의 돈을 키바의 조직 운영비로 기부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는 의무 사항이 아니란 점을 명시한다.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대출과 기부에 모두 참여한다."

2. '듣는 이의 언어'로 설명

"아무리 좋은 사명이라도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언어'로 나의 사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키바를 창업할 당시에는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라는 용어가 유명하지 않았다. 크라우드펀딩이라는 용어도 없었다. 그 당시 이 사업에 관해 설명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이 혼란스러워했다. 숱하게 설득에 실패한 뒤에야 요령을 익혔다. 상대방에게 친숙한 화제로 대화를 연 뒤, 차근차근 내 입장으로 상대방을 끌어오는 것이다.

가령 투자 전문가에게는 키바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이 수천만달러 자금을 조달하러 벤처캐피털 리스트를 찾는다. 이 상황을 운영비 500달러가 필요한 캄보디아의 여자 재봉사 이야기로 바꿔보자. 이 사람에게 스무 명이 25달러씩을 무이자로 빌려주고, 대출 기간이 끝나면 상환받는 개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온라인에 넣어서 생각해보라.'

또 비영리재단 모금 전문가에게는 '부자 한 사람에게 모든 돈을 기부받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25달러씩을 모아 기업가를 후원한 뒤 몇 달 뒤 이 '기부금'을 돌려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듣는 사람이 익숙한 용어를 사용해 사업 구조와 목표를 설명하기 시작하자 사람들 반응도 달라졌다. 이 일을 이해하고 참여하려는 뜻을 밝히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조선비즈


3. 대출 사고 투명하게 공개

"2007년 봄, 키바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큰 사고가 터졌다. 우간다 현지에서 대출 신청을 심사하고 관리하는 현지 파트너였던 WITEP라는 조직이 대출금을 횡령한 것이다. 액수가 12만5000달러에 달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연자실했지만, 자존심을 버렸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들의 돈이 대출 신청자에게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직 운영비로 기부받아 쌓아둔 사내 유보금으로 돈을 환불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엄청난 질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우리가 솔직하게 사고 경위를 설명해준 점에 대해 고맙다고 했고, 자신들이 이 조직의 일부로 느껴진다며 더욱 신뢰한다고 했다. 환불 처리한 돈을 다시 대출금으로 내놓은 사람도 상당수였다.

완전한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운영하는 일은 어렵다. 자칫 조직이 취약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투명한 조직을 만드는 일은 기업가 스스로나 조직을 위해 가장 유익한 일이다. 잘하고 있는 일, 잘못한 일을 정직하게 보여줘야 조직 전체가 함께 개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조직만이 투자자들에게 '돈만 댄'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심어줄 수 있다."

4. '큰돈 기부' 유혹에도 소액 원칙 유지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열망이 큰 사회적 기업가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목표를 잃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분명한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사업적으로 좋아보이지만, 기업을 세운 본래의 목표와 맞지 않는 기회가 찾아올 때도 있다. 키바의 사명은 '빈곤을 줄이기 위해 대출이란 방법으로 사람들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돈만 내고 잊어버리는 단순 기부, 단순 대출이 아니라 대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돈을 빌리려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키바가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키바를 설립하고 1년 반쯤 뒤에 큰 유혹이 찾아왔다. 1000만달러를 키바에 투자할 테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빌려준 뒤 돌려 달라는 IT 기업의 제안이었다. 직접 사람들의 사연을 살펴보고 나눠서 대출에 참여하라는 제안에 그 기업은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손쉬운 방법으로 엄청난 자금을 연결할 기회였지만, 결국은 거절했다. 만약 그 돈을 덜컥 받았다면, 우리는 대출 참여자들이 직접 사람들의 사연을 살펴보고 관심을 갖는 '연결'이라는 사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것이다. 키바 플랫폼은 끝까지 사명에 집중했기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윤예나 기자(ye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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