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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유럽 도자기 여행⑫ - 포르투갈] 루트 개척자의 명품 ‘비스타 알레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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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항해시대 초기 세계를 양분했던 나라다. 항해왕 엔히크 왕자의 주도로 아프리카 연안의 탐사를 실시했던 포르투갈은 1419년 유럽국가 가운데 최초로 대서양 원정대를 파견하고 마데이라, 아조레스 군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세네갈, 카보베르데 제도,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진출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1488년 바로톨로뮤 디아스에 의해 희망봉이 발견되면서 동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항로가 개척된다. 토르데시야 조약 이후 경계선을 기준으로 스페인은 서쪽으로 확장해 갔고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확장해 갔다. 그 결과 1498년 포르투갈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데 이어 1513년에는 중국 남부 광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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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 중국에서 가져온 수입품 중 도자기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MK스타일 / 사진 ‘유럽 도자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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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와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1557년에는 마카오를 조차함으로써 본격적인 대중국 무역을 활성화했다. 이렇게 시작한 포르투갈의 수입품에는 중국 도자기가 있었고, 1520년대에는 대략 4만~6만점이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중국 자기 독과점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면서 네덜란드의 도전을 받았고, 포르투갈은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1602년과 1604년에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와 카타리나호가 네덜란드에 나포된 것을 계기로 중국 도자기의 유럽 수출에 관한 주도권이 네덜란드 상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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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히크 왕자의 북아프리카 세우타 침공을 그린 상벤투 역 아술레호의 일부. 아비스 왕조의 동 주앙 1세의 막내아들로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는 포르투갈이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 세우타 점령으로 막대한 금을 손에 넣은 포르투갈은 이를 기반으로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브라질과 아시아까지 뻗어나간다. ⓒMK스타일 / 사진 ‘유럽 도자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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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할 만큼 도자기에 대한 안목이 있었던 포르투갈에서 독자적인 도자기를 만든 것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늦은 1824년이다. 시작은 1812년 아베이루 인근 일랴부에 있는 에르미다 농장을 왕족이자 상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조제 페헤이라 핀토 바스토(Jose Ferreira Pinto Basto, 1774~1839)가 구입하면서다.

마침 그 인근 지역은 점토와 모래, 결정화된 자갈 등이 풍부해 유리와 도자기 산업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는 40에이커의 땅을 바로 사들여 사업을 추진했고, 1824년 주앙 6세로부터 도자기 제조 허가를 얻었다. 이것이 포르투갈의 유일한 도자기 생산업체 ‘비스타 알레그레 도자기공장 (Fabrica de Porcelanas Vista Alegre)이다.

1832년 이 회사는 유리제품과 비눗돌로 만든 항아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왕실 공급의 독점적 지위를 뜻하는 ‘로열’ 글자가 회사 명칭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였고, 회사 설립 10년이 지난 1834년 드디어 경질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후 1880년 유리제품 생산을 중단하면서 도자기에 집중하게 된다. 1851년 비스타 알레그레는 런던 전시회에 처음 참가해 포르투갈 도자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1852년 페르난도 2세가 공장을 방문하면서 왕실을 위한 완벽한 디너세트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1867년 파리 전시회부터는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는다.

하지만 1822년 포르투갈의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한 이후 경제 사정은 나빠지면서 도자기 산업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의 혁명으로 마누엘 2세가 퇴위하며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그 후로도 쿠데타가 되풀이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에 가담, 참전하게 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제공항 상황에서 비스타 알레그레 역시 쇠퇴의 길로 접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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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타 알레그레의 라인들( 1 비아나 라인, 2 아마존 새를 주제로 한 브라질 라인, 3 카사블랑카 라인, 4 코랄리아 라인). ⓒMK스타일 / 사진 ‘유럽 도자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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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주앙’이 공장 책임자로 오면서부터이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이 회사의 작품들은 아르데코와 기능주의의 영향을 받아 미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1947년부터 1968년까지의 기간 동안 유럽의 다른 도자기 회사들과 교류하면서 기술적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라 영국 왕실 식탁을 위한 디너 세트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비스타 알레그레 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1964년, 새로운 제품 창조를 지원하는 ‘비스타 알레그레 예술발전센터(Centro de Arte e Desenvolvimento da Empresa, CADE)가 생긴 것은 1985년이었다. 이러한 영향인지 1980년대 말부터는 브랜드의 국제적 명성을 반영해 이 회사의 작품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이나 밀라노 궁전 등에 전시되기 시작한다.

비스타 알레그레는 지난 2001년 아틀란티스 그룹과 합병해 비스타 알레그레 아틀란티스 그룹으로 재탄생하면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자기 회사로 발전했다. 그리고 2009년 비자베이라 그룹이 이를 인수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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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타 알레그레와 라크루아가 함께 만든 ‘나비의 행진(Butterfly Parade) 라인’. ⓒMK스타일 / 사진 ‘유럽 도자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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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타 알레그레가 갖고 있는 강점은 바로 디자인이다. 산호초에서 영감을 얻은 ‘코랄리아(Coralina)’ 라인, 북아프리카 감성을 잘 드러낸 ‘카사블랑카(Casablanca)' 라인,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루아(Christian Lacroix)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이 회사의 강점을 잘 드러내준다. ‘나비의 행진(Butterfly Parade)’ ‘피카시에트(Picassiette)’ ‘태양과 그림자(Sol y Sombra)’ ‘포룸(Forum)’ 등이 라크루아와 함께 만든 작품들이다.

이는 비스타의 우아함과 라크루아가 가진 세련미의 결합을 보여준다. 그 결과 색채와 형태, 직선과 그래픽 모티프, 꽃과 바로크 디자인이 독특하면서도 불손할 정도로 도전적인 즉흥 연주를 통해 동시대적 걸작으로 태어났다.

라크루아의 예술감독 사샤 왈코프는 이 협업에 대해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기그릇과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아마도 할머니의 영향이 큰 듯하다. 할머니는 도자기 도시 리모주가 있는 리무쟁(Limousin) 출신이었다. 라크루아 도자기 컬렉션을 만드는 과정에서 항상 자연적인 감정이 충만함을 느꼈다. 비스타 알레그레의 노하우는 라크루아 브랜드의 ‘창조적 우주’를 나타내는 데 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비스타의 제품 가운데 아마존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새들에서 영감을 얻은 ‘브라질(Brasil)’라인과 블루 스트라이프가 인상적인 ‘하버드(Harvard)’라인 등도 매우 매력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MK스타일 주동준 기자 / 도움말 : 조용준 (‘유럽 도자기 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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