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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목멱칼럼]고암 이응노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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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 관장] 며칠 전 대전의 이응노미술관 이지호 관장이 카톡으로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이관장님,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암 이응노 화백 전시기념포스터가 파리지하철 역사에 부착되었어요. 훌륭하죠?”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에는 지하철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파리 시민들과 이응노의 대표 작품인 ‘군상’이 인쇄된 전시포스터를 찍은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필자는 감회가 새로웠다. 프랑스 최고의 아시아미술관인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이 이응노 화백의 예술성과 미술사적 업적을 인정했다는 명백한 증거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은 20세기 서구와 극동아시아의 문화적 교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이응노를 기념하고자 ‘군중을 그리는 사람 이응노’ 전시(6월 9일~11월 19일)를 기획했다.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 르 파리지엥 등도 전후 유럽에 정착한 동양화가들 중에서 동서양 미술을 융합해서 독창적인 양식을 확립한 화가는 이응노가 유일하다며 기획전 취지에 공감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응노 화백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이외도 여럿 있다.

먼저 오는 9월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조르주 퐁피두센터에서 이응노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권위 있는 유명미술관에서 연달아 개인전을 개최하는 일은 예술가에게 큰 영광이며 국제적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경력은 학벌이 아닌 미술관 전시경력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작가 브랜드 구축이나 국제적 인지도를 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작품가격상승을 주도한다. 파리에서 개최되는 두 미술관 전시가 더욱 의미가 깊은 것은 한국이 주도하는 국제교류문화행사를 위한 전시가 아니라 프랑스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자체적으로 이응노의 작품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기획한 전시라는 점에 있다. 게다가 두 미술관은 이응노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주요 미술관에서의 작품 소장 여부는 전시경력만큼이나 작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소장이력은 미술품의 예술적, 경제적 가치를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응노의 작품은 현재 세르누쉬 파리시립동양미술관 100여 점, 퐁피두센터 3점, 스위스라 쇼드퐁 미술관 7점을 비롯해 파리국립장식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덴마크, 이탈리아, 영국, 대만, 일본 등 세계 각국에 소장되어 있다. 이응노는 미술사적 업적만큼이나 훌륭한 또 한 가지 공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의 국제화에 기여한 공로다.

1964년 61세의 이응노는 파리에서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세르누쉬 미술관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한국미술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프랑스인에게 전파하는 선구적 활동을 했다. 안타깝게도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이응노의 미술사적 가치와 의미,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한 개척자로서의 업적이 국내에서는 저평가돼있다. 필자는 그 배경으로 1967년 한국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던 수난사를 꼽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이응노, 윤이상 등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응노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감해 파리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는 두 번 다시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89년 86세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 이유에서 미술인들은 분단역사의 희생양인 이응노를 ‘20세기 블랙리스트 화가’로 부르기도 한다.

최근 프랑스 미술관들이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시점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전시, 학술심포지엄, 책자 발간 등을 통해 이응노의 예술성과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취임과 함께 핵심 현안으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적폐 청산을 약속했다.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한 이응노의 명예회복이 블랙리스트 적폐청산의 신호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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