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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만물상] "양승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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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대법원장이 휴일에 열 명 남짓 대법관들과 등산을 갔다. 서너 시간 걸리는 가벼운 산행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모여 쉴 때를 빼고 선두는 늘 대법원장이었다. 아무도 그를 앞서지 않았다. 대법원장이 특별히 산을 잘 타서 그랬던 건 아니다. 사법부 수장에 대한 대법관들 나름의 존중 방식이었다.

▶그런 문화는 일선 판사들에게도 있다. 점심 시간, 서울 서초동에서 연장자가 가운데 서고 젊은 두 사람이 좌우에서 '삼각 편대'로 걷는다면 십중팔구 재판부다. 가운데가 재판장, 좌우가 배석판사다. 그 틀에 박힌 모습에 '재판부 갈매기'란 말까지 나왔다. 일부에선 '법조 예절'이라 당연시했지만 어떤 판사들은 '수직적 위계질서'라며 마땅찮아 했다. 그래도 웬만해선 드러내놓고 비판하진 않았다. 판사들에게 재판장은 그렇게 어려운 존재다. 그러니 대법원장은 말할 것도 없다. 사법부 권위 그 자체였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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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시대가 완전히 바뀐 모양이다. 지난 19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 이후 판사 전용 게시판에 인신공격성 글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어느 고법부장 판사는 회의 진행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비아냥대는 후배 판사들에게 글로 뭇매를 맞았다. 급기야 양승태 대법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양승태씨'라고 부른 글까지 올라왔다. 내용 없이 제목으로만 "양승태씨는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 주십시오"라고 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다 못한 김창보 법원행정처 차장이 게시판에 "법관 품위를 지켜달라"는 글을 올렸다.

▶대법원이나 대법원장에게 잘못이 있다면 판사도 비판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문제는 이 게시판이 익명(匿名)이라는 것이다. 법관회의를 앞두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일부 판사 요구를 받아들여 법원행정처가 지난달 만들었다. 그런데 판사들이 그 익명의 그늘에 숨어 할 말 못할 말 다 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한 판사를 향해 "꼴통 새X"라고 욕설 퍼붓는 네티즌들과 다를 게 없다. 오죽했으면 이를 두고 "요즘 판사들이 '키보드 전쟁'을 한다"는 말까지 나올까. 각자 독립된 재판 주체인 판사들이 집단행동 하듯 나서는 것부터 바람직하지 않다. 법원 내에서도 "부끄럽다"는 자성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재판부가 법정에 들어서면 방청객이 다 일어선다. 법에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사회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 권위에 대한 존중의 표시일 것이다. 그 권위와 판사의 품위를 몇몇 판사가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다.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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