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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Story in news] 정유라·유섬나·패터슨 한국 데려올때, 그가 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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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백 송환팀장이 겪은 해외 도피 범죄인들]

- 기내서 K팝 들은 정유라

"조금 통통해졌네" 말 건네자 정씨 "덴마크 구치소에서 감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요"

- 파리서 송환된 유섬나

"유씨, 기내서 별말 않고 밥도 한술도 안뜨더라… 수갑 보여도 괜찮다고 해"

- 현지 경찰에 공들이기도

한국 출장온 바누아투 경찰에 관광 시켜주고 음식 사줬더니…

대출 사기범 전주엽 넘겨받아

#1. 지난달 3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 한국으로 강제 송환 길에 오른 정유라(21)씨가 취재진을 피해 갑자기 항공기 계단을 뛰어올랐다. 정씨 바로 옆엔 중년의 사내가 바짝 붙어서 함께 뛰었다. 송환팀장인 박원백(57) 법무부 국제형사과 사무관이었다.

정씨는 원래 덴마크 구치소에 구금돼 있었다. 박 사무관은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덴마크 당국으로부터 정씨를 인계받았다. 박 사무관이 첫인사로 "TV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통통해진 것 같네요?"라고 하자, 정씨는 "구치소에서 감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요"라고 했다고 한다. 정씨는 박 사무관과 몇 마디 더 나누자 긴장이 좀 풀린 듯 "나 때문에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말했다.

한국으로 오는 기내(機內)에서 K팝 뮤직비디오를 보던 정씨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가 가까워지자 다리를 떨고 숨이 가빠졌다. 정씨는 박 사무관이 "인천공항에 취재진이 대기 중"이라고 하자, "변호인이 얘기할 거고 나는 말 안 할 거다"고 했다. 박 사무관은 "그런데 정씨가 취재진 질문에 거의 빠짐없이 답하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

#2. 지난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항공기 기내엔 3년 2개월 만에 송환되는 세월호 선주(船主) 유병언(사망) 회장의 장녀 유섬나(51)씨가 앉아 있었다. 그의 손목에는 파리공항에서 채워진 수갑이 드러났다. 박원백 사무관이 수갑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주려 했다. "괜찮습니다. 가리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갈게요." 유씨가 사양했다. 박 사무관은 "유씨는 기내에서 내내 별말도 않고 밥도 한 술도 안 뜨고 성경만 읽었다"고 했다. 인천지검으로 압송된 유씨는 "나는 한 번도 도피한 적이 없다. 세상이 바뀌길 기다렸다"며 수갑 차고 선 채로 한참 동안 '기자회견'을 했다.

박 사무관은 1990년 검찰 수사관이 됐다. 영어를 곧잘 해 해외 도피 범죄인들을 국내로 데려오는 강제송환팀에 단골로 차출됐다. 이 업무를 보는 법무부 국제형사과에서 근무한 것도 8년이 넘었다. 경력이 쌓이면서 '송환팀장'을 맡고 있다.

그가 송환에 참여한 사람은 이른바 BBK 의혹 사건(2007년)의 김경준(51)씨, 여신도 성폭행 혐의로 도피 7년 만인 2008년 붙잡힌 JMS(기독교복음선교회) 총재 정명석(72)씨,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의 진범 아서 패터슨(38) 등 110명이나 된다. 김씨와 패터슨은 미국에 가서 데려왔고, 정씨는 중국에서 송환해왔다. 박 사무관은 지금까지 범죄인 송환을 위해 총 40여 개국을 찾아갔고, 한 해 평균 20여 회 외국 출장을 간다.

박 사무관은 오랜 도피 생활 끝에 붙잡힌 사람 대부분은 '체념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16년 만에 미국에서 송환된 이태원 살인사건 범인 패터슨은 달랐다고 한다. 패터슨은 비행기 안에서 성경을 손에 쥔 채 옆자리에 앉은 박 사무관에게 "(살인은) 에드워드 리가 했다. 난 안 했다. 재판에서 꼭 무죄를 받겠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리는 처음에 살인범으로 몰렸던 패터슨의 친구이다. 패터슨은 올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 형이 확정됐다. 박 사무관은 "패터슨은 왜 자기가 끌려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며 순진무구한 척을 했다"고 돌이켰다.

안산에서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하고, 필리핀으로 도주해 관광객들을 납치·살해한 일당의 두목 최세용(50)씨는 2013년 송환될 때 박 사무관이 '안전하게 송환하겠다'고 하자 "내 안전? 언제부터 내 안전? 건드리면 나 가만 안 있어. 누구든 죽일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잠시 뒤엔 "억울하다"고 읍소했다고 한다. 박 사무관은 "항공기 내에선 행여 난동이라도 피울까 봐 가만있었지만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런 엄청난 죄를 짓고 억울하긴 뭐가 억울하냐'는 소리가 튀어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2015년 강제 송환된 '1조8000억원 대출 사기 사건'의 주범 전주엽(51)씨는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서 호화 도피 생활을 하다가 검거됐다. 박 사무관은 "한국에 출장 온 바누아투 경찰들을 데리고 다니며 관광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면서 전씨를 잡아달라고 설득했다"고 했다. 공을 들인 덕분인지 몇 주 뒤 박 사무관은 피지 공항에서 바누아투 경찰들이 데려온 전씨를 넘겨받았다. 당시 전씨는 값비싼 명품을 담은 큼직한 가방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 5년 사이 해외로 도주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람은 700여 명이다. 법무부가 강제 송환한 사람은 지난해 55명, 올해는 6월 말 기준 42명이다. 박 사무관은 "한국 여권만 있으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 즉 범죄인이 도망칠 수 있는 나라가 170개국"이라며 "한 명 한 명 끝까지 쫓아 잡을 것"이라고 했다.

[박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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