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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NOW] 청춘, '옛날 3D직업'에 미래를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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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푸줏간·가죽공방… 남들 꺼리는 직업서 '匠人의 꿈']

대학중퇴하고 경주마 편자 제작, 취업 대신 마장동서 정육점 개업

소셜미디어로 무장, 판로 뚫어… 불황으로 죽어가던 골목도 살려

25일 부산 강서구의 경마장 '부산·경남 렛츠런파크' 뒤편 마방(馬房). 경주마 40여마리가 생활하는 이 마방에서 이자경(24)씨가 쇠망치와 쇠집게로 500㎏이 넘는 경주마 '볼드킹즈'의 뒷발을 들어 발굽을 꼼꼼히 확인했다. "발굽이 다친 데는 없는지, 편자를 언제 바꿔주면 될지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다 편자를 갈아줘야 할 때엔 직접 갈아주는 거죠."

조선일보

"기술은 늙지 않는다" - 한국 최연소 말발굽 기술사인 이자경씨가 25일 오전 부산 강서구 경마장 렛츠런파크의 마방(馬房)에서 말발굽 편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맨 위 사진). 서울 성동구 마장동 정육점 매장에서 소 갈빗대를 어깨에 둘러멘 20대 사장 홍석태(아래 왼쪽)씨와 서울 연희동 가죽공방 케이디(Kei.d)에서 가방을 손보고 있는 사장 김동율(아래 오른쪽)씨의 모습. /김종호 기자·김지호 기자·장련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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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주마의 발굽과 말이 신는 신발인 '편자(발굽에 덧대는 쇳조각)'를 관리하는 장제사(裝蹄師)다. 80여명 되는 국내 장제사 중 최연소다. 알루미늄 편자를 말발굽 모양에 맞추기 위해선 2파운드(약 1㎏)짜리 망치로 10분은 족히 두들긴다. 이씨는 대학 새내기이던 2012년 용돈 벌이로 경마장에서 일하다 '장제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말이 좋았다. 땀 흘리며 일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다니던 대학(전북대 토목공학과)을 미련없이 그만뒀다. 부모님과 친구들 모두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다르다. 친구들이 취업 고민할 때 어엿한 기술자가 됐다. 그는 "수입은 대기업 사원보다 좀 적지만 내 기술이 있어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옛날 직업으로 눈 돌리는 '2030 청년'이 늘고 있다. 화이트칼라 직장 대신 전통 기술을 갈고 닦아 자신만의 길을 찾겠다는 '청년 장인(匠人)'들이다. 마구간, 대장간, 푸줏간, 양조장 등 한때 '젊은이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터'로 향하는 이들이다.

지난 23일 서울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만난 홍석태(27)씨는 소 갈빗대 한 짝과 씨름 중이었다. 뼈 사이로 칼을 넣고 소 해체 작업을 했다. 마장동에 정육점 '하늘축산'을 개업한 것이 2년 전. 4년제 대학 경영대에 다니면서도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러다 '내가 좋은 고기 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는다'는 생각에 마장동으로 향했다. 친척 어른들은 "멀쩡한 대학 나와 정육점을 하느냐"고 말렸다. 가게를 차린 후 손님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온라인 블로그·소셜미디어를 통해 '좋은 소고기 파는 집'이라는 점을 마케팅했다. 지금은 두 살 어린 친척 동생까지 동업을 시작할 정도로 자리 잡았다. 그는 "더러운 일, 힘든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많지만 남들이 찾지 않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청춘들은 쇠락하던 '장인들의 거리'에 새 바람을 불러온다. 서울 세운상가는 최근 '청년 메이커(maker·제조업자)들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세운상가 일대 20·30대 청년들의 공방(工房)이 50개를 넘는다. 전자제품 제조에 필요한 부품·공구를 구하기 쉽고, 숙련된 기술 장인들로부터 수시로 조언을 얻는다. 3D(입체) 프린터와 레이저 커터(cutter) 등 고가 장비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생겼다. 청년 장인들은 전통 기술을 계승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스타트업 '5000도씨'의 옥은택(25) 대표는 용접 기술과 3D 프린팅 기술을 융합 중이다. 용접용 금속 와이어를 재료로 사용하는 3D프린터를 만드는 것이다. 용접 기술도 직접 배웠다. 그는 "용접 일이 위험해 보인다는 친구도 많지만, 세상에 없는 걸 스스로 만든다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불황으로 비어 가던 서울 성수동 수제화 거리를 채우는 건 젊은 수제 구두 장인들이다. 구두가 좋아 광고회사 영업직을 박차고 나온 윤지훈(35)씨도 "세계 최고의 구두장이가 되겠다"는 청년 중 하나다. 2년 동안 백화점 구두 가게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한국제화아카데미 등에서 구두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신었는지 모를 정도로 편한 구두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꾼다.

서울 연남동·연희동에는 윤씨처럼 가죽제품·액세서리 등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젊은 사장들이 모인 '공방 거리' '공방 골목'까지 생겨 인기를 끌고 있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학벌이나 집안 배경과 무관하게 기술을 익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전통 산업'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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