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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경향시선]나뭇잎을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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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들이 점점 커진다

샌들은 나무, 내 발은 나뭇잎, 큰 신이 벗겨지지 않는다

나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신고 있다

바람이 좌판 빨강색 귀걸이를 만질 때

왼발이 꺼진 핸드폰 속 숫자를 누른다

햇살이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길 때

오른발이 칼 박물관의 칼의 ㄹ을 지우고 있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길이 흔들린다

나를 신고 가지를 뻗어가는 두 장의 지도

나뭇잎이 지도를 벗어나 휘날린다

나도 모르게 나의 발을 자른 걸까

벗지 못하는 DNA와 신지 못하는 DNA

오른발이 홈쇼핑의 글루코사민 광고를 보고

왼발이 아일랜드에 풍차를 세운다

나뭇잎아, 오래오래 아주 오래

공중에서 머물러라

오줌을 싼 이부자리 지도가 지워지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처럼

샌들이 커진다 점점 커진다 - 박도희(1964~)

경향신문

발가락이 다 나오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발이 나뭇잎이 되는 느낌. 발이 가지 위에서 파닥거리는 느낌. 발이 샌들을 벗어나 공중으로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 시인은 추리닝 바지를 입고 콩나물을 사러 가는 것 같지만, 실은 나뭇잎을 사러 가는 중이란다. 시인은 샌들을 직직 끌며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잎맥의 지도를 따라 하늘과 우주를 탐색하는 중이란다.

바람이 통하는 샌들을 신고 걸으면 샌들 위에서 두 그루 나무가 자라는 느낌. 머리카락마다 일어나는 수만 개의 잎이 바람을 받아 파도 소리를 내는 느낌. 발바닥 밑에서 올라온 수액으로부터 땅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느낌. 읽은 책과 검색한 스마트폰 정보도 나이테에 저장되는 느낌. 해외로 여행하지는 못해도 발은 상상력을 달고 세상 어느 곳이든 다 다닐 것 같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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