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2 (일)

[편집국에서] 한국형 히든 챔피언의 성공조건 / 박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박현
경제 에디터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좋은 일자리 만들기다. 극심한 양극화와 청년 실업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고려할 때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문제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를 실현할 것인가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불러모아 민원을 들어주는 대신 일자리 창출을 주문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9988’(중소기업 숫자가 전체의 99%, 중소기업 고용이 전체의 88%)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의 보고는 중소기업에 있다. 중소기업에서 얼마나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치마킹해야 할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다. 세계적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갖춰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글로벌 강소기업(히든 챔피언) 보유 국가는 독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독일이 1307개로 전체의 48%나 되고, 한국은 23개로 0.8%에 불과했다. 독일의 이런 성공에는 대-중소기업 간 상생의 문화가 큰 몫을 하고 있다.

8년 전 독일에 유독 강소기업이 많은 이유가 궁금해 취재를 간 적이 있다. 특히 대-중소기업 관계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이를 파악하고자 한국 대기업과 독일 대기업에 동시에 납품을 하는 강소기업들을 찾았다. 프로이덴베르크도 그중 한 곳이다. 독일 남서부 바인하임에 있는 이 업체는 자동차·전자업체에 방진고무와 윤활제 등을 납품해 한 해 매출이 9조원에 이르고, 53개국에 3만4천여명의 직원을 둔 세계적인 부품회사였다.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는 외르크 지베르트 사장은 ‘거래를 할 때 두 나라 대기업의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은 가격을 중시한다. 특히 납품가격을 내려 달라는 요구가 강하다. 반면 독일은 기술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가장 중요한 이슈다.” 이런 말도 해줬다. “독일 대기업은 주력업종에 집중하면서 중소기업을 동업자로 여기고 노하우와 기술을 인정해준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한국 대기업은 우리가 납품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인수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경우를 봤다. 철학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소기업중앙회의 하도급거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제조원가는 올라도 납품단가는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하락했다는 곳이 태반이다. 중소기업 전문가 한정화 교수는 중소기업청장 재직 당시의 소회를 적은 책(<대한민국을 살리는 중소기업의 힘>)에서 대-중기 관계에 대해 “과거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했다.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료를 올려도 잘못 항의했다가는 그나마 있는 경작지마저 빼앗기게 될까 두려워하는” 신세라는 것이다.

최소한 네 가지를 검토했으면 한다. 첫째는 이익공유제 도입이다. 이는 미리 설정한 목표이익을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하면 이를 협력업체와 나누는 제도다. 둘째는 재벌 회장들은 상생을 얘기하지만, 실제 구매담당 부서에선 납품단가를 깎아야 자신들의 성과가 올라가게 돼 있는 인센티브 구조를 바꿔야 한다. 셋째는 불공정 행위를 하다 걸리면 엄청난 손해를 본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소통-자율 변화-단호한 법집행’이라는 3단계 재벌개혁 방식을 제시했는데, 자율적 변화는 사실상 어렵다는 건 이미 증명이 됐다. 단호한 법집행이 초반부터 이뤄져야 할 것이다. 넷째로, 중소기업의 해외 판로 개척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이런 작업들이 지속돼 중소기업의 경쟁력과 임금이 올라야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인생 진로의 하나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hyun21@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 페이스북] [카카오톡] [위코노미] [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