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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마광수·장정일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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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금지란 치명적인 유혹의 언어다. 인간은 금지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동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취사선택이 가능한 존재를 무시하고 금단의 열매를 갈구한다. 책세상에도 이 법칙은 변함없이 적용된다. 문학계에는 금서라 불리는 가치재가 존재한다. 금서란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지적강박을 부여하는 불멸의 언어집합소다.

수많은 작가들이 금서라는 족쇄의 희생양이 되었다. 금서의 기준은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서 흔하게 적용했던 사례가 바로 외설논쟁이다. 국내에서 외설문학가라는 오명에 시달렸던 문인이 떠오른다. 바로 마광수라는 인물이다. 하필이면 마광수는 교수로서 가장 두각을 나타낼 시기에 외설문학 논쟁에 휩싸인다. 당시 수구적인 학계, 문학계, 검찰은 대한민국판 분서갱유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누구도 문학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토로하지 않았다.

마광수가 누구인가. 1983년 논문 <윤동주 연구>로 대한민국 최고의 윤동주 연구자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박사학위 취득. 20대 후반의 나이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홍익대 전임교수 발탁. 1989년 성담론을 위주로 한 문화비평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기록. 1992년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강의 중 전격 구속. 이듬해 연세대에서 직위 해제.

시대를 살짝 앞서간 작가의 운명은 실로 험난했다. 마광수는 염재만의 소설 <반노> 이후 성담론의 지평을 확장했다는 찬사를 받기는커녕 마녀사냥의 제물로 전락한다. 이러한 ‘마광수 때리기’는 창작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숨통을 틀어막는 악재로 작용한다. 1996년에 터진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외설시비에 이르기까지 순수문학과 외설문학의 경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게 대한민국 작가에게 성문학이란 금기의 언어로 남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제1항을 보자.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가의 표현의 권리는 법률로 보호함이 당연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예술의 자유란 미의 추구로서 예술창작 및 표현의 자유와 예술적 결사의 자유를 근거로 한다고 나온다. 위 문구는 마광수나 장정일의 작품이 탄압의 대상이 아님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은 문학검열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21세기 이후 한국문학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문학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행히도 문학작품에도 보이지 않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한국문학의 시계는 1990년대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작가 필립 로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권력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반대로 소설을 읽는 것은 깊고 독특한 기쁨이며, 섹스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활동이라고. 작가의 말처럼 문학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문학은 현실이 보여주지 못하는 신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고마운 전령이다.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아마도 그곳은 폭력과 협잡만이 난무하는 개미지옥과 흡사할 것이다.

지금도 금기에 도전하는 문학작품을 쓰는 예비작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혼탁한 현실을 전복하려는 단어의 조합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의식하는 순간부터 창작의 힘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바른 작가는 언제나 금서에 도전한다. 동시에 금서가 사라지는 내일을 갈망한다. 금서의 재발견을 통해서 쓰는 자의 창작욕구를 지켜주는 문학풍토가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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