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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서사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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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구좌파와 보수는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2007년 대선 민노당 지지자 다수가 권영길이 아닌 이명박을 지지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조기숙씨의 5월5일 트위터 글이다. 이 글은 2천번 가까이 리트위트 되었다. 조씨는 잘 알려진 정치학자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이고 노무현 정부 홍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저런 주장을 했을 땐 근거가 있을 터였다.

정작 그는 해당 글타래에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최근 조씨가 펴낸 <왕따의 정치학>이라는 책을 사고 인터넷 검색도 해봤다. 검색에 걸린 관련 자료는 하나였다. 2007년 <한겨레21> 기사 ‘민노당은 또 사표론에 삐끗하는가’. 여기에 ‘민노당 지지 및 호감층’ 501명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대선에서 누구를 가장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 34.8%가 ‘이명박’이라 답했다. 다른 후보들은 한자릿수였고, 민노당(민주노동당) 후보인 ‘권영길’이라 답한 비율은 14.8%였다. 얼핏 조기숙씨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민노당 지지자 다수가 권영길보다 이명박을 더 많이 지지한 게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민노당 지지 및 호감층’에는 막연히 호감을 지닌 사람, 민주당·한나라당 지지자 일부, 지지 정당 없는 무당층까지 다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에도 명시됐지만 501명 중 자신을 민노당 지지자라고 밝힌 사람은 불과 63명(12.5%)이다. 즉, 애초 표본집단 내에 이명박 지지자들이 상당히 많은 수를 점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명박을 지지하지만 민노당도 싫지는 않은, 그 정도 성향의 시민이다. 만약 조기숙씨가 저 조사를 근거로 민노당 지지자 다수가 이명박을 지지했다고 주장한 것이라면, 말 그대로 억측이다. 그 억측이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큰 모욕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을 테다.(혹 다른 근거를 갖고 있다면 제시해주길 바란다.)

조기숙씨가 쓴 <왕따의 정치학>에는 ‘구좌파’와 진보언론을 향한 울분이 300여쪽에 걸쳐 토로되고 있다. 요사이 온라인에서 일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이 “구좌파” “신좌파” 운운해서 의아했던 적이 있는데, 책을 읽자 단박에 의문이 풀렸다. 비유컨대 이 텍스트는 소위 ‘구좌파라는 악’을 타도하기 위한 ‘신좌파의 사도신경’이었다. 대략 이런 이야기다. ‘구좌파는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구태의연한 집단인 반면, 신좌파는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무장한 진정한 21세기 진보세력이다.’ ‘최초의 신좌파는 노무현 정부와 지지자다. 그러나 구좌파-진보언론은 수구세력과 합세해 노무현을 왕따시키고 박해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명확히 밝혀둔다. 조기숙씨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당파성이 아니다. 조씨가 공론장에서 명확히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학자나 정치평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다. 오히려 지식인이 정치적 사안에 관해 불편부당한 심판 노릇을 해야 한다는 관념이야말로 위선과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악습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 자체가 아니라 그걸 드러내는 방식이다. 흔히 혼동되곤 하지만 당파성과 진영논리는 엄연히 다르다. 둘 다 어느 쪽을 명확히 편드는 행위여도 결정적 차이가 있다. 당파성은 합목적적이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종종 혹독한 내부 비판이 일어난다. 반면 진영논리는 판단 기준이 오직 ‘우리편’의 유불리다. 때문에 소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로 상징되는 비일관적 행태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왕따의 정치학>을 읽고 절감했다. 조기숙이라는 사람은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 서사에 사실이 부합하지 않으면 사실을 바꾸거나 삭제해 버린다. 사실에 바탕해서 서사를 엮어내는 게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사실을 욱여넣는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서사과잉’ 증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는 오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조자들의 확증편향과 정치적 효능감을 강화하기에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친노’를 일베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허지웅씨를 ‘시민징계 리스트’에 올려 정치발언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왕따의 정치학> 186쪽)에 이르면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조기숙씨는 어느 순간 민주주의자의 한계선을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말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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